아버지 제삿날

아버지의 삶의 철학

by 불비

아버지 제삿날


아버지 제삿날이라고

어머니는 화장을 고치고 다시 조기를 굽고

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며 제육을 볶고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고


새알 같은 차돌을 숯멍불에 구워

호주머니에 넣고

겨울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추위를 견디며

오늘을 쉬지 않고 견디면

오늘 같지 않는 내일이 온다고


폭설이 내리면 꿩 사냥을 해

꿩을 까시나무불에 바짝 구워 먹으며

꿩 새끼도 때가 되면 스스로 살아가듯

홀로 고독을 지고

제 길은 제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며


가을에 밭고랑을 뒤엎어 굵은 고구마를 캐서

지게에 한 가마 지고 산 비탈길을 내려오며

삶의 무게를 지고 걸을 때는

한쪽으로 쏠리지 말라며 중심을 비틀거리지 말라며





아버지의 삶의 철학


아버지 제삿날이다. 아버지를 기억나게 하려 어머니가 분주히 움직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조기를 굽고 돼지고기 제육을 볶는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어머니 자신도 꽃단장한다. 이 세 가지가 자극물이 되어 시인의 마음 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시인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를 구현시킨다. 아버지는 인생의 철학자의 모습으로 신체화되었다. 시인은 철학자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철학자 아버지의 첫 번째 명제는 “버티는 자기 이긴다”이다. 겨울은 춥다. 이 추운 겨울을 버티면 자연법칙에 따라 따뜻한 봄이 온다. 문제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버티느냐 하는 것이다. 아버지 철학자가 내놓은 방법은 작은 따뜻함과 꾸준한 움직임이다.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하다. 이 추움을 부인할 수는 없다. 추움은 추움대로의 가치가 있다. 추움의 존재를 인정하므로 추위를 덮어 가리지 않을 정도의 새알 크기의 따뜻한 차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추운 겨울을 버틴다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정적인 무동작이 아닌 동적인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도 불규칙한 움직임이 아닌 꾸준하고 규칙적인 움직임이다. 철학자 아버지는 이런 꾸준한 움직임을 겨울 자전거 페달 밟기에 비유한다. 작은 따뜻함과 꾸준함 움직임으로 버티는 자에게는 오늘 같이 춥지 않은 따뜻한 내일이 온다.


철학자 아버지의 두 번째 명제는 “아이는 홀로 버티며 살다 보면 결국 제 길을 스스로 찾아낸다”이다. 아이는 이성이 아닌 감정의 동물이다. 아이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라서 자신의 몸에 불편함이 있으면 인내하지 못한다. 아이에게는 이성의 중심지인 전전두엽피질이라는 뇌 부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전두엽피질이 완전히 발달하고 마지막으로 성숙에 도달하는 데까지 20년이 훨씬 넘게 걸린다. 그때까지 아이는 이성이 아닌 감정의 통제를 받고 살아간다. 20년이 지나 전전두엽피질이 자리를 잡고 나면 아이는 스스로 주변을 살피고 판단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스스로 독립하는 존재로 성숙하는 것이다. 성인인 철학자 아버지는 아이의 감정 지향적 행동을 이해하므로 자식의 전전두엽피질이 완전히 성숙할 때까지 자식을 돌보면서 지켜봐 주었다.


철학자 아버지의 세 번째 명제는 “인생에서 균형을 유지하라”이다. 우리 인간은 침팬지처럼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유인원 종이다. 유전학 분석에 의하면 침팬지는 계통적으로 사람에 가장 가깝고 DNA의 98% 전후를 공유한다고 한다. 사리사욕과 이기심의 속성 때문에 인간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도 나의 주관성과 상대의 주관성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주관적 사고 때문에 인간은 삶에서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철학자 아버지는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때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고 말한다. 그는 중용을 이야기는 듯하다.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은 객관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객관성은 재미없다. 객관성은 사람의 모습을 배제한다. 철학자 아버지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중용을 넘어서고자 한다. 아버지가 말하는 중용에서는 인간이 삶의 무게를 지고 걷는다. 삶에서는 사람이 중심이다. 사람이 배제된 객관적인 중용을 지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삶에서 충돌은 불가피하다. 나의 주관성과 너의 주관성이 충돌하듯이 말이다. 이런 두 주관성의 충돌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나의 주관성과 너의 주관성이 결국은 상호주관성이 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서로의 마음을 왔다 갔다 왕래하면서 결국은 두 주관성에서 교차점을 찾아야 한다. 그 교차점이 철학자 아버지가 말하는 상호주관적 중용이다.


시인은 아버지 제삿날에 아버지의 철학을 마음 깊은 곳에 담으며 아버지를 느낀다. 시인은 아버지의 세 가지 명제를 느끼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다. 철학자 아버지의 명제가 담긴 세 개 연은 ‘온다고’, ‘한다며’, ‘말라며’처럼 마무리가 되지 않고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아버지의 철학적 명제를 머릿속에 계속 되뇌면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모습이다. 나 역시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내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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