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앞 밤길을 걸으며

주술화된 융합의 모습을 그리다

by 불비

고향집 앞 밤길을 걸으며


고향집 앞 들밤이 깊다


칠흑보다 더 칠흑 같은 어둠이 깊게 베여도

가끔씩 켜지는 가로등 불빛은 따뜻하고

늦봄 개구락지 목청은 푸른 피 토하도록 푸렁푸렁해

외롭지 않다


저쪽 끄트머리 인실못에는 수장되어 있는

어릴 적 추억이 달빛과 뒤엉켜 처벅처벅 댄다


노동을 닮은 농노의 물소리는

메말라 까칠까칠하지만

여울가에서 첫사랑 물몸매를 훔쳐보며

가슴 뛰듯 물장구치던 물소리가

아직도 귀가에 첨벙댄다


구름은 어제의 이야기로 달밤을 밀어내고

케빈이 컹컹대던 소리는 마루가 컹컹대고

아버지가 걸었던 그 들길을 지금은 내가 걷고 있다

주술화된 융합의 모습을 그리다




주술화된 융합의 모습을 그리다


시인은 고향집 앞 들길을 걷는다. 그 길은 예전에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다. 그 길을 이제 시인이 아버지 나이쯤이 되어 걷는다. 과거의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과거의 시인은 아들이었다. 현재의 아버지는 부재하고, 현재의 시인은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시인은 두 개의 머릿속 공간을 설정한다. 한 공간은 과거이고 다른 한 공간은 현재이다. 과거의 공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현재의 공간에는 시인만 존재한다. 현재의 시인은 아버지가 그립다. 그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아니 그 그리움을 더욱더 큰 그리움으로 키우기 위해, 시인은 예전에 아버지가 걸었던 들길을 걷고 있다. ‘들길 걷기’라는 행동으로 시인은 이제 아버지와 융합된다. 과거 공간에 있는 아버지의 정체성을 현재 공간의 시인 자신과 융합시킨 것이다. 이런 융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접착제가 필요하다. 그 접착제는 나이이다. 과거 아버지와 나이와 현재 시인의 나이는 엇비슷하다. 이런 비슷한 나이가 시인의 융합 작업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제 시인은 자신이 과거의 아버지가 되어 들길을 걸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승화하고 주술화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승화하는 작업에 시인은 ‘들길’을 활용했다. ‘들길’에는 속성인 대립어가 즐비하다. 첫 번째 대립어는 ‘어둠과 불빛’이다. ‘어둠과 밝음’이다. 두 번째 대립어는 ‘메마름과 물장구’이다. ‘건조함과 축축함’이다. 대립어란 그 뜻이 서로 대립되는 관계이다. 대립어가 되기 위해서는 한 쌍의 말 사이에 서로 공통되는 의미 요소가 있고 동시에 서로 다른 한 개의 의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어떤 두 사물이 대립된다는 것은 둘 간에 90% 이상이 같다는 것이 전제로 깔린다. 성인인 ‘남성’과 ‘여성’는 서로 대립된다. 둘 다 포유류이고 인간이고 성인이다. 단 성별에서만 차이가 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대립된다. 둘 다 사람이고 성인이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성별에서만 차이가 난다. 이처럼 대립과 반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90% 이상이 같아야 한다.


시인은 ‘어둠과 가로등 불빛’, 즉 ‘어둠과 밝음’이라는 대립성을 단순 대립이라는 차원에 두지 않는다. 시인은 어둠과 밝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은 어둠이 없다면 밝지 않다. 시인이 가로등 불빛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오로시 칠흑 같은 어둠 때문이다. 어둡지 않다면 늦봄에 울어대는 개구락지의 목청이 잘 들렸겠는가? 어둠이라는 시각 때문에 개구리 울음의 청각이 힘을 발휘한다. 개구리 소리로 인해 시인이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 것 역시 칠흑 같은 어둠 때문이다. ‘시각’이라는 어둠과 밝음의 차이가 가능한 것은 어둠과 밝음이 90% 이상 같기 때문이다. 이런 같음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은 가로등 불빛과 개구리의 큰 울음소리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들길 저쪽 끄트머리에 있는 인실못은 ‘메마름과 물장구’, ‘건조함과 축축함’이라는 대립성을 품고 있다. 농노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논은 메말라서 건조하고, 여울가에서는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 축축하다. ‘어둠과 가로등 불빛’의 대립성에서는 현재라는 머릿속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면, ‘메마름과 물장구’는 ‘어릴 적 추억’이라는 시구를 통해 과거라는 머릿속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건조함과 축축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건조한 땅에 물을 부으면 이내 축축해지고, 축축한 땅은 태양 아래에 오래 있다 보면 다시 건조해진다. 동일한 차원에서 시인은 첨벙대는 소리 쪽을 지향한다. 그런 지향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다. 첫사랑 소녀가 여울가에서 물장난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 받은 자극 때문이다. 그 옛 추억의 첨벙대는 물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이 시는 융합의 시이다. 이런 융합의 모습은 첫 연에서 등장하는 ‘들밤’에서도 볼 수 있다. ‘들’이라는 공간과 ‘밤’이라는 시간을 압축하고 융합한 표현이 ‘들밤’이다. ‘들밤’은 시인이 공간과 시간을 융합하기 위해 사용하는 독창적 표현이다. 시인은 바로 이 시구를 첫 연에 등장시킴으로써 그다음 연들에서도 융합을 시도하려는 의지를 강하고 피력한다. 융합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치지만, 그 결과는 기존의 두 가지에 없는 속성을 창작해 내는 과정이다. 기존의 두 가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두 가지는 융합 후에는 은근슬쩍 그 모습을 감춘다. “구름은 어제의 이야기로 달밤을 밀어내고”에서처럼, 어두운 달밤이 구름에 밀려 은근슬쩍 모습을 감추고, 환한 낮에 볼 수 있는 구름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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