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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민호 Jun 03. 2024

데미안과 스탠 바이 미

성장

데미안을 읽고 중학교 3학년 아이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어른이 되어 데미안을 만났지만, '청소년기에 읽었다면 좋았을 걸'하며 후회를 하기도 하고, 지금의 10대 아이들에게 읽기를 권하는 책 중 하나가 데미안이다.


좋은 책의 공통점이 있다. 반복해 읽다 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책을 나이를 한 살 먹을 때마다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동으로 책이 내게 다가온다. 보이지 않던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흘려보낸 문장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남자아이이다. 싱 클레어는 한 세계에 머물러 있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고 어머니가 있으며 밝음과 올바름이 있는 세계다. 아이가 세상의 전부라 믿는 세계다. 그런데 주인공은 하나의 세계 옆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다른 세계는 첫 번째 세계와 대비되지만 강렬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


강렬한 다른 세계의 이면에 호된 신고식을 치른 싱 클레어의 내재된 혼란이 나타난 문장이다. 10살 남자아이의 머릿속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이해가 간다. 나에게 첫 칼자국은 무엇이었을지 난 그때 어떤 세계에 강렬하게 유혹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 경험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아이들은 첫 번째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아이들이 데미안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심리적 혼란이 난해한 문장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 심리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인공 싱 클레어가 성장하며 겪는 과정은 누구나 겪게 된다.

나 또한 아버지의 집이 높고 포근하다 보니 안주하며 그 혼란을 늦게 겪은 것 같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피할 수도 없는 문제고 일찍 겪었어야 하는 혼란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른이 되어 밝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겪어야 하는 나이에 겪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한다.


데미안을 다시 읽다 보니 '스탠 바이 미'라는 오래된 영화가 떠오른다. 나에게는 최고의 성장 영화로 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이다. 특히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들의 앞에 놓인 길, 소년들은 유년의 여정을 마치고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친구와 함께 모험을 떠날 수도 있었지만 이제 각자의 앞에 놓인 길을 친구와 함께 갈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 앞에 놓여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험이 끝나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고 잊히지가 않는다. 데미안과 함께 보면 좋은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도 싱 클레어와 같다. 안락하고 안주하고 싶은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한다. 아이다호라는 걸작을 남기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리버 피닉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도 있는 영화다. 


데미안을 중학교 3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고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데미안 같은 고전 소설을 초등학생 때 혼자 읽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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