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사진 출처: 영화 '화차'
결혼 한 달 전, 부모님 댁에 내려가던 중 휴게소에 들른 문호와 선영. 커피를 사러 갔다 온 문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문이 열린 채 공회전 중인 자동차뿐이다. 꺼져있는 휴대폰, 흔적도 없이 선영은 사라졌다. - 영화 '화차'
그런데 조사 결과, 이름, 나이, 가족... 그녀의 모든 것이 가짜였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소녀, 그 시절처럼...
필터도 벗겨지고 미화된 모습도 사라진 '진짜 그녀'는 우리가 기억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녀'는 옛 시절에 대한 은유다. 팍팍한 세상을 살다 보면 '좋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세계질서라는 보호막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우린,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잊었다. 알고 있다고? 그럼 다음 5지선다 문제에 답을 해보라.
*지난 세기 중 가장 평화로웠던 4 반세기를 고르시오.
1) 1901-1925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공산주의와 파시즘 탄생
2) 1926-1950년: 히틀러와 스탈린 등장,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핵무기 개발 및 사용
3) 1951-1975년: 냉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매카시즘,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란혁명
4) 1976-2000년: 이란-이라크 전쟁, 소련 붕괴, 걸프전쟁, IMF 아시아 금융위기
5) 2001-2023년: 9.11 테러, 이라크전쟁, 세계 금융위기, 코로나-19 대유행, 러-우전쟁
정답은 무엇일까? 명확히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있다. 세계는 '미국중심의 자유주의 세계질서' 아래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 엔리코 페르미
이 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우리뿐이라면, 정말 무지막지한 공간의 낭비다. 그런데 정말 외계인들이 존재한다면 그중엔 우리보다 뛰어난 문명이 있을 것이고, 그럼 어떻게든 그들과 만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는 건 이 우주에 '생명 혹은 의식의 탄생'이라는 현상이 오직 지구에서만 일어난 아주 특별한 우연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브레튼우즈 체제(자유주의 세계질서)'도 생명의 탄생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특수한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
20세기, 미국은 독특한 입지에 놓이게 된다. 먼저 미국의 땅덩이가 놓인 위치를 살펴보자. 동서는 아주 넓은 바다와 접하고 남북은 국력에서 미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두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세계 강대국들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사실상의 섬나라다. 역사상 강대국들은 자국의 군사력을 국경 가까이 두어야 했다. 이웃나라들에 취약한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만이 예외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대규모 군사력을 전개할 여력을 갖추게 되었다. 다음으로 미국은 넓은 땅덩이만큼 부존자원량도 어마어마하다. 필수적인 식량, 에너지 2가지 모두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효율적인 자본배치로 위 두 가지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세상만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례 없는 강력한 역량을 갖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전대미문의 초강력 국가가 되었을 무렵, 기존의 강자 영국과 프랑스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자기 앞가림에 급급한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기존의 문제(독재적인 군사강대국 독일과 일본)와 새로운 문제(소련 공산주의)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고심 끝에 꺼내든 카드가 상호방위동맹체제였다. 미국은 의외로(?) 2차 대전 동맹국 소련이 아닌 적국이었던 독일, 일본과 손 잡았다. 미국인들은 독재체제보다도 급진주의(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 오늘날은 이슬람)를 훨씬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 두 나라를 점령하고 지속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키자,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 군사적 역량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경제대국으로 서서히 변신하였다. 이걸로 문제 하나 해결. 다른 하나의 문제도 해결 방식은 비슷했다. 소련을 둘러싼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 미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역내 균형자' 전략이다. 쉽게 말해, 지구평화와 바닷길은 '캡틴 아메리카'가 지키고 자유민주주의 우방국가는 석유를 달러로 사고 미국채를 사는 방식으로 미국의 국방비 부담을 나눠가지는 방식이다(브레튼우즈 체제). 캡틴 아메리카의 보호 아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방비에 쏟아부었던 자국의 에너지와 재원을 국내 문제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마음껏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중, 일, 러에 둘러싸인 한국이 대표적인 수혜국가였다.
그랬던 미국이 변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중동과 같은 구제불능 지역에 왜 인명과 돈을 쏟아부어야 하며, 독일, 일본, 대한민국 같은 부유한 동맹국들이 자국을 지키는데 필요한 국방비 부담을 더 짊어지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자국 경제와 안보 이익에 직결되지도 않은 문제들 때문에 전쟁을 하려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며 해외 개입 축소를 주장하는 미국민의 요구는 지난 30년 동안 나날이 커져왔다. 이는 어쩌면 합리적 의문이다. 미국은 남의 도움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국제경찰이 사라지면,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간다. 원래 세상은 '법칙도 심판관도 없고, 착하다고 상을 주지도 않는' 밀림 같은 곳이다.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실수에 대해선 죽음으로 심판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현재의 세계질서가 붕괴되면 한국은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게 된다. 한반도는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호랑이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밀림의 한복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