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리스본 2 일차-LX 팩토리

느리게 읽기

by 카이저 소제

맛있는 나타와 커피는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순식간에 홀라랑 사라졌다.

시끄럽지는 않은데 또한 차분하지는 않은 실내 분위기,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긴 대기줄 때문에 오래 앉아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포장한 나타 세트를 가방에 넣고 우산을 비롯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서 일어났다.

일단 화장실을 들르기로.

화장실은 모두 1층에 있었다.

손을 씻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

'어? 우리 계산을 안 한 거 같은데 ?!'

우리나라 카페에서는 늘 주문할 때 미리 계산을 하는 버릇이 되어서 당연히 결제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눈이 동그레진 딸이 후다닥 뛰어나간다.

자리에 돌아가니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계산서 들고 오더란다.

머나먼 타국에서 본의 아니게 나타 먹고 먹튀 할 뻔.


맛있는 것을 먹고 나니 여행길이 좀 만만해지는 느낌이다.

때맞춰 날씨도 말갛게 개어서 볕이 나고 있었다.

다음 일정은 LX 팩토리.

딸이 집어넣은 일정이라 어떤 곳인지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곳에 '르 드바가르'라는 이름의 독특한 서점이 있다고, 엄마를 위해 찾았다며 생색을 많이 내긴 했다.

나타 가게 앞에서 도로를 건너면 버스와 트램을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다. 그곳에서 15번 트램을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곳.사겸사 리스본의 트램도 타볼 수 있는 적당한 동선이다.

정류장에는 버스와 트램의 노선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구글 지도랑 비교하며 내리는 곳 정류장 이름을 거듭 확인하고 몇 정거장을 더 가는지까지 세어두었다.

낯선 길에서 길치가 덜 헤매려면 일단 꼼꼼해야 한다.

트램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정류장 안내방송도 없었다.

미리 세어둔 정거장 수를 떠올리며 헷갈리지 않게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렸다.


트램에서 내린 곳은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사람이 드문 골목길, 그리고 골목을 채운 건물들이 어딘가 낡아 보이고 우중충하다. 깨진 창문을 달고 있는 건물도 있어서 더욱 을씨년스럽다.

트램을 타고 그닥 멀리 온 것도 아닌데 제로니무스 수도원 부근이랑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도를 보며 걷노라니 자꾸만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어두울 때 다닐 길은 아닌 듯하고, 밝을 때도 혼자서 다니기에는 뒤통수가 조금 땡길만한 길이다.

이쯤이다 싶어 두리번거리니, 열린 철대문 위에 길게 걸려있는 'LX FACTORY' 간판이 보인다.

알전구로 만든 간판 글씨가 반짝인다. 어딘가 빈약하고 어설프고 촌스러워 보이는 간판 글씨가 나름 정감 있기도 하다.

입구는 마치 전자나 섬유공장 정문 같은 느낌이다.

알고 보니 예전에 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바꾼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알전구가 반짝이는 낡은 철대문, 한 때는 이곳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트럭과 피곤에 찌든 공장 직원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내부는 밖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낡았지만 꽤나 감각적이려고 노력한 티가 나는 호스텔 건물과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 바, 그리고 작은 기념품 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낮고 낡은 건물들 사이로 길게 뻗어있는 뺀질한 돌길 위에는 역시나 노천 테이블이 즐비하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뭐랄까, 젊은이의 거리 같은 활기 넘치는 분위기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도심 거리가 펼쳐진 듯하다. 번화한 아우구스타 거리의 골목 하나를 통째로 떼어다 갖다 놓은 느낌인데 좀 더 오밀조밀하고 감각적이다.


작은 가게들이 올망졸망 연이어 있는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꽤 붐빈다.

발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들어가서 구경했다.

관광지에서 판매하는 상업적인 물건들을 '키치'스럽다고 한다. 디자인이나 품질이 조야하지만 오히려 그 촌스러움 때문에 관광상품으로써 인기가 있는 물건들이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상품의 장점 중 하나는 가격이 만만하다는 것인데 이곳의 기념품들은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물건 하나하나에 가격표가 따로 붙어있다. 작가들의 디자인 값을 매겨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기념품 가게 앞에서 지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가격대비 딱히 이거다 싶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가게를 들락날락 구경하던 중에 좌표 찍어 왔던 서점이 눈에 들어온다.


재즈 음악으로 가득한 서점, '르 드바가르'.

인쇄소 건물을 개조했다는 이곳은 층고가 높고 빈티지한 느낌이 가득하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나 2층 바닥이 철구조물이라 서점이라기보다는 창고 같기도 하다.

진열된 책들 중에는 낡은 중고서적도 많았으며 오래된 레코드판과 CD를 판매하는 코너도 있었다.

서점 위 천장 쪽에 매달린 금속으로 만든 큰 조각품이 단연 눈길을 끈다. 날개 달린 자전거, 그 자전거를 날듯이 타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자유분방하고 멋지다.

1,2층을 두루 다니며 기웃기웃 서점 구경만 해도 볼 것이 꽤 많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으니 굳이 책을 찾아볼 염은 생기지 않는다. 책이 빠진 서점 구경은 수박 겉만 핥는 듯 맹맛이다. 근데 가끔은 생각 없이 맹하게 있는 것도 좋다.

2층 창가, 볕이 비현실적으로 한가득 들어오는 창문 앞에 나란히 앉아서 졸듯이 쉬었다.

서점이나 카페나 식당이나 어딜 가나 정장 입듯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이곳은 유니폼 입은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사거나 말거나, 뭔가를 읽거나 졸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재즈 음악 가득한 창고 같은 서점이 무지 편했다.


<르 드바가르>.

우리말로 <느리게 읽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책을 살 것도 아닌데 굳이 외딴 서점을 찾아왔던 것은 다름 아닌 이름 때문이다.

<느리게 읽기>라니.

꽤나 멋스럽게 느껴졌다.

세상은 늘 빠르고 정확한 것을 선호하는데 느리게 하라고 말해주니 기분 좋다.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파에 떼밀려 재바르게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짧고 은근하게 위로를 주는 듯하다.

느리게 쉬엄 쉬엄...그래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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