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리스본 2일차-박물관 고양이

카르무 수녀원

by 카이저 소제

아이가 대여섯 살쯤 됐을 때였다.

근처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그림 전시회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발소리도 죽여서 그림을 보고 있자니 꽤나 심드렁하던 아이, 갑자기 전시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개미들을 무척이나 재밌게 보고 있었다.


어제 문 닫기 30분 전쯤 가서 못 들어간 카르무 수녀원, 오늘은 기필코 가보리라.

점심 식사 후 바로 수녀원으로 이동했다.

수녀원의 이끼 낀 외벽이며 근처 거리까지 이미 둘러봤는데 왜 굳이 가봤던 길을 되짚어가면서까지 수녀원을 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정에 들어있으니 꼭 봐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도 아니다. 그냥 궁금했다.

아마 '지붕 없는 수도원'이라는 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녀원에 도착했을 때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리스보아 카드가 있음에도 1인당 5유로씩 추가 입장료를 내야 한다. 둘이 합해서 10유로 결제.

포르투갈은 성당이며 수도원이며 궁전이며 어디를 들어가려면 일단 지갑부터 꺼내 들어야 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지붕이 무너져 내린 수녀원, 그래서 일명 지붕 없는 수도원이라 불린다는 이곳.

지진과 연이은 화재로 무너지고 그을린 건물을 재건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지진 후 재건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교단이 없어지면서 무산된 이후 고고학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건물 외벽 위로 뻗어올라 길게 감싸듯이 하늘로 향한 아치형 석조건물의 잔해는 여전히 위용 있어 보인다.

회백색 색깔 때문인지 길쭉한 아치형 모양 때문인지 마치 거대한 공룡의 갈비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4세기말에 이렇게 크고 정교한 석조건축물을 지었다는 것도 놀랍고 지진으로 무너진 이후 지금까지 270여 년의 세월 동안 건물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어마어마한 수도원을 건축할 정도의 교단이 없어졌다는 것 또한 놀랍다.


검게 그을린 벽체와 뻥 뚫린 지붕 위로 보이는 잿빛 하늘 때문에 어딘가 처연한 느낌도 드는 수녀원.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경내를 다니고 있음에도 분위기가 스산하고 으스적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수도원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맥이 좀 빠지려는 찰나, 꽤나 잘생긴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띈다.

목걸이를 하고 있는 통통한 녀석의 까만 털은 윤기가 자르르르하다. 사랑을 듬뿍 받고 관리도 더불어 듬뿍 받는 고양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 녀석이 꽤나 늠름해 보인다.

초인종 소리에도 우다다다 도망가기 바쁜 우리 집 겁 많은 고양이 '치즈' 생각도 난다.

치즈보다 잘 생겼다는 둥 흰소리를 하며 도도하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고양이 녀석을 잠시 지켜보았다.


비가 조금씩 거세지길래 박물관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칸칸이 방으로 연결된 박물관에서 전시된 물품들을 두서없이 눈길 닿는 대로 둘러보았다.

책과 자료들로 가득한 방은 휘릭 둘러보고 지나쳤다.

책장 유리문 안에 꽁꽁 들어있어서 제목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마리아 안나'라는 이름이 새겨진 석관도 있다. 오스트리아 여왕이었다는데, 그 석관 안에 진짜 시신이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유리로 된 나지막한 진열대가 놓인 방이 나온다.

진열대 안에 전시된 물건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짧은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유물들이다.

얘네들이 왜 여기에 있어?


카르무 수녀원 박물관에 이집트의 관과 남미의 미라가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남녀 어린아이들의 미라, 웅크린 채 유리상자 안에 붙박여 전시된 미라를 직접 보고 싶지는 않았다.

살아서 움직였던 사람을 전시하고 구경하는 것이 무섭고 불편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 미라를 유리상자 속에 고정해 두고 관광객의 구경거리로 삼지는 않을 것 같다. 포르투갈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나는 타국의 유물들. 생뚱맞고 불편하다


모녀의 취향이 드물게 비슷한 것 하나, 박물관 관람을 따분해한다는 것.

비를 피해 들어와서 이 방 저 방 설렁설렁 둘러보고 있자니 마음이 헛헛하다.

고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유리장 안에 박제하듯 보관해 둔 물건들을 다만 바라보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다.

그만 나가서 차라리 비를 맞자 싶은데 예의 그 잘 생긴 고양이 녀석이 어슬렁 낭창하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녀석 몰래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싶어 폰을 슬쩍 들이대니 웬걸?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오똑 자리 잡고 앉더니 심지어 포즈를 잡는다.

고도로 훈련된 고양이거나 아주 똑똑한 고양이거나.

'내가 고양이를 키워봐서 아는데' 고양이는 스스로 훈련되기보다 집사를 길들인다.

고로 박물관 고양이 녀석은 관광객의 습성을 이해하는 아주 똑똑한 녀석임이 분명하다.

미동 없이 도도하게 앉아서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 박물관의 잘생긴 고양이.

고고학 박물관에서 진기명기를 보여주는 녀석은 알고 보니 카르무 수녀원의 마스코트라고 한다.

쪼그리고 앉아서 이 녀석과 눈을 맞추고 몇 가지 질문도 던지면서 마침내 박물관에서의 신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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