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리스본 2 일차-쇼핑

피팅룸만 없는 게 아니고

by 카이저 소제

엄마와 딸 둘이서만 다니는 여행이니 짐을 최대한 가볍게 꾸렸다.

최소한의 옷, 그것도 가벼운 간편복으로 한 두 벌.

신발은 신고 있는 것 달랑 하나.

필요하면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

얼마나 짐이 적었든지 인천공항체크하는 곳에서 '멀리 가는데 짐이 적네요'라는 말도 들었다.


카르무 수녀원에서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 전망대는 지척이다.

수녀원 건물 안에서 전망대로 가는 뒷문이 있다는 글을 딸이 어디서 읽고 두리번거리긴 했는데 찾을 수 없었다. 눈에 잘 띄면 그건 샛길이나 뒷문이 아닌 거지.

순순하게 정문으로 다시 나왔다.

직원분의 친절한 설명대로, 정문에서 나가는 방향 기준 왼쪽으로 꺾어서 수녀원 외벽을 따라가니 엘리베이터 전망대가 나왔다.

넓지 않은 전망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카르무 수녀원의 하늘을 찌를 듯한 외관은 안에서 보는 것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새삼 얼마나 대단한 건물이었는지 체감이 된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장대비로 바뀐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아랑곳없이 전망대를 메운 관광객들이 곳곳에서 도심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다.

시야가 희뿌옇게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도심을 뒤덮은 예의 빨간 지붕이 운치 있게 도드라진다.

전망대를 따라서 한 바퀴 휘이 둘러보고 나니 더는 할 것이 없다.

참에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볼까 싶은데 언제쯤 운행을 하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다.


근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아우구스타 거리 뒷골목으로 이어진다.

빗길에 다니기가 후줄근하다.

차라리 쇼핑이나 하자 싶었다.

마침 신발 양쪽 앞코가 캐스터네츠처럼 쩌억 벌어져서 덜렁거리던 참이다.

환하게 불 밝힌 'H & M' 매장이 보인다.

한국에서 인터넷 쇼핑으로 몇 번 사본적 있는 제품, 가격이 그닥 부담 없었던 기억이 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매장은 크고 넓었다.

옷과 신발과 모자와 속옷과 액세서리까지 상품 종류도 다양하다.

운동화 치수를 표시하는 기준이 달라서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 몇 개를 연거푸 신어 도 내 것이다 싶게 잘 맞는 것은 없다.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신을 수 있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그나마 발이 편한 운동화로 낙점.

크기는 얼추 맞는데 밑창이 얄브리하다.

가격이 싼 야구 모자가 보이길래 그것도 덥석 하나 집어 들었다. 엉겁결에 산 이 모자는 지금도 요긴하게 잘 쓰고 다닌다.


결제를 하려는데, H&M 회원가입을 하면 10% 할인을 해준다며 권한다.

여행 중이라고 하니 그래도 상관없다고.

뜨내기 여행객에게 회원가입을 권하다니 의아하긴 한데,

10% 할인이 또 무시 못할 마력이라 회원가입 절차를 물어보았다.

전화번호 등록을 비롯 뭐가 꽤나 복잡하다.

길어지고 빨라지는 말을 못 알아 들어서 복잡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개인정보를 낯선 나라에 흘리고 가는 것도 찜찜한 노릇이다.

공연히 만용을 부렸다.

상황을 리셋하는 마음으로 그냥 계산해 달라고 했다.

계산대 앞에서 오래 있으니 딸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온다.

'회원 가입을 권하길래 안 한다고 했어'라고 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눈치 백 단 딸이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인다.

'듣기가 안되면 토익공부라도 좀 하든지...'


운동화랑 모자랑 합해서 53.18유로. 우리 돈 8만 원쯤이다.

운동화가 7만 원 정도.

가격대비 운동화 품질이 좋지는 않다만 앞코 벌어진 신발을 갈아 신은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하다.

외국의 빠당한 낯선 지폐는 부루마블 장난감 종이돈 같다. 트레블 체크카드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돈이 아닌 숫자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외국여행 중에 필요이상 소비를 하게 되는 이유이다.

평소와 달리 물가에 민감하지도 않을뿐더러 필요 없는 소비에 대한 죄책감도 덜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이 아주 작정한 듯 내린다.

딸이 아무래도 운동복 한 벌을 사야 될 것 같다고 한다.

아우구스타 거리에서 아디다스 매장을 봤었는데 빗속에 찾아가기가 대략 난감이다.

근처에 있는 쇼핑센터라고 크게 쓰여있는 건물로 일단 들어갔다. 쇼핑센터 1층 로비는 비를 피하러 들어온 사람들로 붐볐다.

2층에는 스타벅스를 비롯 다양한 메뉴의 식당도 있고 운동복 전문 매장도 있다. 그리고 화장실도 있다.

일단 옷을 사고, 아직 배가 고프지 않으니 스타벅스에서 차 한 잔 마시다가 이곳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숙소로 들어가면 딱 좋을 듯했다.

비를 맞지 않고 필요한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낙낙해졌다.

2층 운동복 매장은 제품명이 낯설다.

매장 한 켠에 운동화도 제법 많아서 공연히 미리 샀다고 잠시 후회했는데, 가격표를 보고는 미리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꽤 비싸다.


여성복 코너에서 사이즈를 확인한 후 트레이닝복 세트를 집어 들고 피팅룸을 찾으니 안 보인다.

직원에게 피팅룸이 어딨냐고 물어보니 아예 없다고.

윗옷은 그냥 걸치면 되니 입어보라고 한다. 평소 입는 것처럼 오버핏으로 편하게 잘 맞다.

바지가 아무래도 커 보여서 고민스러운데 일단 구입하고 안 맞으면 갖고 오란다. 1주일 이내에 영수증 들고 오면 된다고.

그래, 1주일 이내에 교환 환불은 되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여유 있게 옷이나 교환하러 다닐 형편은 또 아니지.

옷은 당장 필요하니 일단 샀다. 그리고 바로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직행.

화장실을 피팅룸 대용으로 썼다기보다는 젖은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었는데, 바지가 커도 너무 컸다.

아래위 세트인 같은 사이즈인데 바지가 이렇게 클 수가 있다고?

층층이 주름 잡힌 항아리 속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이 정도 크기면 옷이 아니고 몸에 감고 다니는 짐이다.

체형과 체격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 싶어서 매장으로 가서 한 치수 작은 사이즈로 교환.

여전히 크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은 하다는데 그건 옷이 아쉬울 때의 이야기다. 결국 그 옷은 귀국 후 키가 180 가까운 남편에게 '리스본에서 산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양도되었다.


검은색 후드 점퍼와 조거 팬츠 한 벌의 가격은 95,13 유로. 12만 원이 넘는다.

생각보다 비싸다는 느낌.

우리나라에서도 트레이닝복 세트에 그 정도 가격대가 흔하지만 문제는 딱히 마음에 들만큼 품질이 좋지는 않다. 무엇보다 매장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체크카드 결제내역을 보니 가게이름이 'SNIPES LISABON 007'이다.

snipe, 저격한다는 뜻인가. 여러모로 총 맞은 느낌이긴 했다.

혹시 리스본에서 가볍게 입을 운동복 하나 사겠다고 이 매장에 가는 것은 말리고 싶다.

피팅룸이 없으며, 직원 서 너 명이 서있어도 옷이 고객에게 맞을지 안 맞을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썰미도 없다. 생각해 보면 사실 그 정도의 친절함과 배려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뜨내기 여행객이어서 대충 팔고 말자는 심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체크카드 숫자가 95.13 이 찰카닥 차감되는데, 이때만큼은 사라지는 숫자가 무척이나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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