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리스본 2일차-인종 차별

Don't come in, Chinese!

by 카이저 소제

점심때 먹은 해물밥의 근기가 꽤 오래갔다.

도무지 배가 고파지지 않는다.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에 들어가야 여러모로 편한데 어쩌나.

밥을 차려먹지 않고 사 먹기만 하면 되는 더할 나위 없는 편리함이 이렇게 불편할 수도 있구나 싶다.

쇼핑센터 2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배가 고파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스타벅스에서 빈자리를 찾아 둘러보는 동안 딸이 음료를 주문해서 갖고 오기로.

작고 동그란 테이블 앞 빈 의자가 두 개 보인다.

잠시 뒤 음료를 들고 오는 딸.

심기 불편해 보인다.

자리에 앉아서 몇 모금 마시기도 전에 도로 나가잔다.

'여기서 쉬었다가 저녁 먹고 들어가기로 했잖아'

'그냥 나가고 싶어'

이 빗속에 다짜고짜 나가자고 하니 짜증이 나는데, 일단 이유는 들어봐야지.

'계산하면서 빨대 달라고 했더니 내 쟁반 위에 집어던지잖아.'

그랬구나. 기분 나빴겠네.

딸의 심기보전을 위해 커피는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플라스틱 병에 든 레몬티는 들고 서둘러 나왔다.

내심 드는 생각은 '설마 그랬을라구?'였다.

빨대를 건넨다는 것이 툭 떨어져서 던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천지에 어떤 카페 직원이 고객 쟁반 위에 빨대를 집어던지는 간 큰 만행을 저지르겠냐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직접 겪지 않은 자의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이런 우중충한 기분으로는 식당 가서 밥을 사 먹을 정이 없다. 그렇다고 저녁을 생다지 굶을 순 없으니 마트에서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사기로.

마트 '핑구 도스'에 들르기로 했다.

빵이며 음료며 과일이며 맥주며 종류별로 사서 하루의 노고를 풀다 보면 이 꿀꿀한 기분도 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우산을 접고 마트에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웬 중년남자가 좁은 마트 입구를 막아선다. 그리고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버러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Don't come in, Chinese!"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황당한 상황에 항변하듯이 큰소리로 기껏 내지른 말,

"We are not chinese!"

딸이 내 팔을 확 잡아끈다.

" 여기가 한국인줄 알아? 그리고 중국인 아니라는 말이 왜 나와?"

그러게, 중국인이라고 콕 집어서 특정한 말이 굳이 중국인만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겠나.

중국인은 동양인의 대명사 같은 것일 테니.

BTS와 블랙핑크의 나라, 즉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라고 어필하면 "아임 쏘리, 컴 인 플리즈 "라고 했을까?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마트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다고 따져 묻는 들, 그 당연한 논리가 그 또라이 같은 남자에게 먹혔을까?

대뜸 중국인이 아니라고 큰소리를 내면서 내심 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개입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합의되고 통용되는 것들이 있지 않나. 저열한 인종차별에 동조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근데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마트 안에 와글대는 사람이나 길을 오가는 사람이나 이 말 같지 않은 상황을 단지 구경하거나 모른 체하며 수수방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불친절이 몸에 밴 듯한 리스본 사람들을 떠올리니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포르투갈은 다인종 국가다.

택시기사나 호텔직원, 식당 종업원들은 백인보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멜팅 팟 혹은 샐러드 볼 처럼 어울려 사는 사람들이 동양인은 유독 콕 집어내어 냉대하고 차별을 하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넘쳐나는 관광객이 싫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황인종에 대한 혐오가 있는 것일까.

혹은 정말 중국인을 싫어하나?

머릿속에서 자기 검열을 해보았다.

혹시 나도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혐오스러워한 적이 있는지.

한 때 '양키 고홈'을 외친 적은 있지만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니 패스.

딱 한 번,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한 개 남은 치킨 강정 박스를 보며 지갑을 열려는 찰나, 중국인 여성 둘이 먼저 사는 바람에 약이 올랐던 적은 있다. 마치 내 것을 눈앞에서 뺏긴 듯한 느낌이라 두 사람의 중국어가 심히 귀에 거슬렸다.


숙소로 곧장 들어가서 널브러졌다.

노고를 풀려고 마트에 들렀다가 노고가 첩첩이 더 쌓였다.

입맛은 없는데 어이없게도 뱃속의 허기는 어김없이 몰려온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줄 잡고 기운도 챙겨야지.

간단하게 허기를 메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어제 샌드위치 포장을 해왔던 가게가 생각난다.

화가 나서 씩씩대는 딸을 두고 혼자 가게로 갔다.

여전히 축구중계를 틀어놓은 가게에서 먹기 좋은 야채수프 2인분을 포장주문했다.

주방 할머니가 음식을 만들 동안 폰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훅 들어오는 남자 한 명.

" Do you have coins?"

"......??"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눈만 꿈벅이는데 서빙하던 할아버지가 그 남자를 가로막는다.

카운터 직원은 샌드위치 하나를 종이에 턱턱 싸서 그 남자 손에 쥐어주며 눈과 입과 손으로 동시에 화를 낸다.

정말 어질어질하다.

동전 있냐던 남자, 구걸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듯한데 한 푼 줍쇼의 말투와 태도가 어찌 그리 태연하고 당당하단 말인가.

동전 가진 것 있냐니, 동전 있으면 어쩌라고.

왜소한 동양인 여행객들은 호구 중의 상호구로 보이나 보다.

내가 만약 서양인이거나 남자이거나 백인이었다면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겠지.

'킬빌'의 우마 서먼처럼 천하무적 무술을 익혔더라면..'킬' 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다 확.


할머니표 따뜻한 야채 수프로 우선 허기를 면했다.

후루룩 떠먹기도 좋고 맛도 익숙하다.

숟가락이 없어서 전날 누룽지 먹고 혹시나 싶어 남겨둔 플라스틱 스푼 하나로 먼저 먹고 나중 먹는 궁상을 떨었지만, 뱃속에 뭐가 들어가니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오늘 하루 삼단 콤보로 겪은 불편하고 불쾌한 기억들이 사그리 눈 녹듯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그 충격파를 생각하면 오히려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어 뇌 주름 속에 불쾌한 골짜기로 두고두고 남아있겠지.


아닌 게 아니라 며칠 뒤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지나가던 차량 창문밖으로 누군가 손나팔을 채 '곤니찌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 이거 인종차별이지? 제기럴 !'




리스본 2일 차 일정


제로니무스 수도원 - 발견 기념비 -

스테이스 드 벨렝(나타 맛집)-

LX팩토리 -우마의 해물밥

카르무 수녀원 - 산타후스타 엘리베이터 전망대-

쇼핑 (신발 모자 운동복 세트)-

핑구 도스 마트 (출입거부)-카페 앤 바(할머니표 야채수프 포장주문)- 몹시 정신 사나운 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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