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리스본 3일차-상 조르주 성

무어인이 건축하고 영국 성인의 이름이 붙은 포르투갈 성

by 카이저 소제

1755년 11월 1일, 카톨릭 성자들을 기리는 축일에 리스본은 대지진으로 아비규환이 된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성당을 비롯 리스본 대부분이 파괴되고 쓰나미에 휩쓸렸다는데,

비극적인 재난을 피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리스본 언덕배기에 있는 '알파마 지구'다.

당시 빈민촌이며 홍등가였던 알파마.

카톨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리스본에서 홍등가였던 알파마는 악의 구렁텅이쯤으로 손가락질받았을 터이다. 성자를 기리는 축일에 성당은 무너지는데 홍등가는 멀쩡한 상황 앞에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났다고 하니 인간 이성의 발현은 너무나 큰 대가가 필요했던 듯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볕이 쨍하다.

어젯밤 난리부르스는 지나가고 오늘은 역시 오늘의 태양이 뜨는구나.

리스본 3 일차, 오늘은 알파마 지구로 가는 날이다.

오래전 리스본의 빈민가였던 이곳은 이제 카페와 식당, 전망대가 들어선 관광지로 변해있다고 한다.

리스본을 돌아볼 마지막 날이니 서둘러서 움직였다.

먼저 '상 조르주 성'부터 들르기로.

구글 맵에서는 상 조르주 성까지 걸어서 20분쯤 거리로 나온다. 트램이나 버스를 타도 되지만 도보 20분이면 거리 구경도 할 겸 천천히 걸을만하다.

도보 20분. 알고 보니 구글지도가 알려주는 이 시간은 숙소에서 상 조르주 성까지 직선코스로 선을 주욱 그었을 때 걸리는 도보 시간이다.

알파마 지구로 오르는 길은 리스본의 다른 언덕배기랑은 비교가 안 되는 고난도의 경사길이다.

가파른 언덕길과 긴 계단을 오르느라 가벼운 옷차림에도 땀이 나고 숨이 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양산 하나로 둘이서 폭우를 피하기는 무리다.

쨍한 여름날씨가 갑자기 차가운 겨울날씨로 돌변한다. 가볍게 입고 나온 옷으로는 하루 온종일을 버틸 수가 없다. 걸어온 길이 아깝지만 도로 숙소로 귀환.

어제에 이어 오늘도 뭐가 이렇게 꼬이나 싶은 낭패감이 든다.

털고 말리고 북새통을 떨었더니 점심때가 아닌데도 배가 고프다.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자 싶은데, 둘이 동시에 우마의 해물밥을 떠올렸다.

이 정도면 거의 소울푸드 격이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식당으로 가서 해물밥 2인분에 와인을 곁들여 이른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다.


다시 상 조르주 성으로 출발.

근처 정류장에서 그 유명한 28번 트램을 타기로 했다.

리스본의 유명 관광지를 다 지나간다는 빈티지한 매력이 돋보이는 바로 그 트램.

긴 대기줄에 한 번 만에 타기도 어렵고 자리 잡고 앉기는 더 힘들다는 28번 트램이다.

걱정과 달리 극성수기가 아닌 탓인지 트램에는 빈자리가 제법 있었다.

해물밥집에서 봤던 일본인 여성과 그녀의 어린 아들도 같이 탔다. 제법 큰 애를 안고 뒤뚱뒤뚱 트램을 타러 뛰어오던 그녀와 눈인사를 했다.

여행객들의 동선은 거의 엇비슷하고, 동선이 겹칠 때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트램에서 내린 정류장에서 상 조르주 성이 바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류장에 서있는 작은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목적지 도착.

입구에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로 공작새와 비둘기가 어울려 돌아다닌다.

생김새며 크기는 천양지차인데 바닥에 떨어진 것 주워 먹느라 바쁜 건 똑같다.

입구에는 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리스보아 카드가 있는 줄과 없는 줄이다.

카드가 있는 줄에 서있으니 입장이 빠르다. 카드가 있으면 입장료가 무료, 없으면 1인당 15유로.

카드를 확인한 후 입장권을 건네준다.


대지진 때 지붕이 무너져서 성벽만 우뚝 남아있는 상 조르주 성.

상 조르주는 영국의 수호성인인 세인트 조지의 포르투갈 발음이다.

왜 포르투갈 성에 영국 수호성인 이름이 붙어있냐고?

상 조르주 성은 이슬람인인 무어인들이 11세기경에 건축한 성이다. 12세기 초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을 무어인에게서 다시 되찾은 후 포르투갈의 왕궁으로 사용했다고.

그리고 14세기말 포르투갈 공주와 영국 왕의 결혼 선물로 영국의 수호성인인 세인트 조지에게 성을 헌정, 그리하여 성의 이름이 세인트 조지, 즉 상 조르주로 불린다.

한마디로 무어인이 지은 성을 포르투갈의 왕궁으로 쓰다가 포르투갈 공주 결혼선물로 사돈 나라에 헌정했다는 것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 천년 전 이슬람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놀랍다.


지붕이 없는 성은 크고 넓고 아름다웠다.

조경이 잘 되어있고 공작새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잘 꾸며진 공원 같은 느낌이다.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던 레고 장난감같이 앙증맞던 성벽, 호시우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그림처럼 보이던 성벽이 바로 이곳이다.

리스본에 왔던 첫날, '저기 장난감 같은 성벽은 뭐지?'라고 했던 곳.

비 온 뒤 파랗게 갠 하늘과 더 시퍼런 테주강이 맞닿아 있는 풍경 옆으로 빨간 지붕의 리스본 시내가 어우러진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예의 반들한 돌길과 견고한 성벽도 멋스럽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더 높다란 전망대로 가는 돌계단을 올라갔다.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오르니 성벽을 따라 좁은 길이 구불하게 길게 나 있다. 아주 아주 옛날에 이 길을 따라 보초병이나 군사들이 바삐 지나다녔을 법한 길.

다른 여행객이랑 좁은 길의 중간에서 마주쳤는데 성벽에 찰싹 붙어서 비켜줘야 했다.

어기적 어기적 달달 떨면서 걷다가 내려와서 한숨 돌리니 더 놓은 성벽이 또 나온다.

숙제하는 마음으로 난간도 없는 돌계단을 몇 개 오르다가 오금이 저려서 도로 내려왔다. 롤러코스터 정도 되어야 탈만하다고 여기는 딸은 꼭대기 전망대까지 성큼성큼 올라간다.


성은 공작새 울부짖는 소리로 조용할 새가 없었다.

우아하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공작새가 이렇게 꽤액 목청껏 소리를 질러댈 줄은 몰랐다.

새벽닭울음소리는 리듬감이나 있지 공작새 울음소리는 단말마의 비명 같다.

어릴 적 달성공원에서 봤던 귀하디 귀한 공작새가 비둘기 돌아다니듯이 성안에 넘쳐난다.

망토 같은 긴 꼬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뭔가를 집어먹는 모습은 쇠락한 가문의 귀족을 보는 듯도 하다.

몸집 거대한 공작이 나뭇가지 위를 날듯이 점프하면서 옮겨 다니는 것도 진풍경이다. 긴 꼬리 같은 날개를 푸르르 흔들면서 나는 모습은 마치 만화책에서 본 불사조 같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다가가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불시에 꽤액 내지르는 소리에 외려 내가 식겁했다.

미드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왕과 귀족들의 야외 파티장에서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던 공작새가 신기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유럽의 귀족들은 공작새와 한 지붕아래 어울려 살았나 생각했더라만.

판타지 드라마도 역사고증은 디테일하게 제대로 하나보다.


한 바퀴 휘이 둘러보는데 한쪽 구석에 지붕이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사람들 몇몇이 들어가길래 궁금해서 다가갔다.

바닥에 물기가 질척한 것이 어둡고 습기 찬 곳이다.

안쪽은 못 들어가게 입구에 줄이 길게 처져있다,

갑자기 오싹하다.

중세시대 성이면 지하감옥이나 고문실 같은 것도 있지 않았을까??

내 생각에 내가 지레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서둘러 밝은 곳으로 나왔다.


리스본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가 상 조르주 성인 것에 이견이 없다.

견고한 성벽과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경치 만으로도 발품을 팔 가치가 충분하다.

근처 알파마 지구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화려한 도심과는 다른 운치가 있다.

굳이 지도앱을 켜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녀도 좋은 곳.

가다가 멈추면 푸니쿨라가 보이고 눈길을 돌리면 멀리 강이 내려다보이고 또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보인다.

뚜벅이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여행지이다.

단, 아우구스타 거리에서 상 조르주 성으로 올라갈 때는 어지간하면 트램이나 버스를 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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