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리스본 3일차-테주강변

노을에 물들다

by 카이저 소제

여행계획을 짤 때 어디를 갈 것인가 보다 어디를 안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가볼만한 곳은 넘쳐나는데 길지 않은 시간에 다 둘러볼 수는 없으니.

욕심껏 써놓은 목록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리스본의 '타임 아웃'과 '핑크 스트리트'는 고민없이 삭제한 곳이다.

뭘 많이 먹는 편이 아니니 갖은 음식을 구경하고 먹을 수 있다는 타임 아웃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분홍색 길바닥 위로 무지개빛 우산을 조롱조롱 매달아 놓은 핑크 스트리트는 사진빨로만 어필한다고 여겨졌다.

여행 떠나기 전날까지 갈지 말지를 고민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

일정에 넣고 빼기를 반복했던 문제적 장소.

무어인이 지었다는 중세시대 왕궁을 비롯한 건축물, 그리고 유럽의 서쪽 끝이라는 바다도 보고 싶었다. 신트라와 리스 본을 오가는 열차도 타보고 싶었다. 신트라에서 저녁을 먹고 이른바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탈 수 있으니.

다만 딸의 반대가 제법 컸다.

이동거리가 길어서 버스나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

혼자서 동유럽을 다녀왔던 딸은 유럽의 궁전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바다는 다같은 바다지 유럽의 서쪽 바다가 특별할 게 뭐 있냐는 설득력 있는 주장까지.

고심끝에 타협하기를, 리스본 여행 중에 시간이 널럴하고 여유 있으면 가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맥락상 안 간다는 것으로 정리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온전히 리스본에 머무는 딸랑 3일 중 하루를 근교 투어에 보냈다면, 테주강변에서의 눈물 나게 아름다운 노을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단지 수사가 아닌 진짜 눈물이 났다.

테주 강변을 떠올리면 그 아릿하게 슬픈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살아난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리스본에서의 첫날, 테주 강변 산책과 노을감상은 쏟아지는 소낙비로 취소되었었다.

그리고 마지막날 저녁에 먼 길을 걸어서 다시 왔다.

알파마 지구에서 비카 푸니쿨라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오는 길.

이날 우리는 2만 7 천보 가량을 걸었다.

테주 강변을 향해 가는 길에 목록에서 삭제되었던 '타임아웃 마켓'과 '핑크 스트리트'도 지나쳤다.

"어라? 여기 타임 아웃인데?"

"저기 봐, 우산도 떠있어. 애개개..."

행군하듯이 쉬지 않고 걸으면서 무감하게 나눴던 대화 끝에 나온 말, "부러 안오길 잘했네."

SNS에서 증폭되는 입소문으로 인해 특별할 것 없는 곳이 유명 관광지로 과하게 포장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설핏 든다.

어쨌든 기껏 일정에서 뺀 곳을 우왕좌왕 걷는 걸음에 우연히 둘러보는 것은 일종의 횡재수다.

박제된 사진과 내가 직접 본 현장은 다르므로.

리스본의 관광지들이 오밀조밀 밀집된 덕분이기도 하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질 즈음 코메르시우 광장의 끝에서 테주강을 마주 보고 섰다.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 어둑시그레한 해질 무렵 그 오묘한 분위기 탓일까.

주변 풍경이 어딘가 신비로웠다.

테주강 물속에 우뚝 서 있는 하얀 돌기둥 두 개를 보면서 순간 어이없게도 '저것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인가' 했으니.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정신줄을 놓고 있었나 보다.


비가 갠 후 새파란 하늘, 새파란 하늘에 물감을 붓으로 찍어 누른 듯이 줄줄이 떠있는 새하얀 구름, 잔잔하게 파도치는 강, 그리고 가느다란 햇살을 껴안은 노을.

이 광경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강변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시간이 멈춘 듯, 사람과 풍경이 정지화면처럼 고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용히 노을을 보고 있었다.

조금씩 달라지는 노을의 빛깔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숨죽여 소원을 빌었다.

보름달을 보며,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대웅전이 보이는 마당에서 소원을 비는 버릇대로 테주강 노을을 보며 습관처럼 소원을 빌었다. 세상천지 무서운 것이 없었던 나는 엄마가 되고나서부터 세상 모든 것이 무서워졌으므로.

단지 풍경이 아름답고 근사하다고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테주강 노을 앞에서 묵직하고 잡다한 고민과 생각들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말개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기분 좋게 슬펐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을.

먼 길을 날아 타국에 와서까지 애증의 관계를 어쩌지 못하고 여전히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티격거리던 두 여자는 그렇게 말없이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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