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생긴 일
상 조르주 성의 출구는 인적 드문 좁고 꼬불하고 어둑한 골목으로 연결이 된다.
인적은 드물지만 골목골목 들어찬 카페며 기념품 가게들이 생기 있게 알록달록해서 무섭거나 외진 느낌은 없다.
보는 듯 안 보는 듯 슬쩍슬쩍 가게를 구경하며 지나쳤다.
벽에 구멍을 뚫어 놓은 듯이 하나같이 작은 가게들,
구경삼아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아 선뜻 들어가지지 않는다.
사실 가게 입구에 늘어놓고 매달아 놓은 물건들이 다들 맞춘 듯이 엇비슷해서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은 탓도 있다.
호날두의 나라이며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축구 유니폼이 가게마다 휘날리며 매달려 있고, 비슷한 문양의 푸릇한 아줄레주 타일도 촘촘하게 진열되어 있다.
빨간 돼지 저금통과 알록달록 장난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70년대 동네 구멍가게를 보는 듯하다.
성에서 지근거리인 전망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리스본 첫째 날에 갔었던 알칸타라 전망대를 떠올리며 갔는데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다.
알칸타라 전망대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는 도떼기시장 같다.
움직이면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이 복닥 인다.
그래서 전망대 경치는 좋았냐고?
물론 좋다. 하늘과 바다와 리스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니 좋을 수밖에.
다만 상 조르주 성에서 바라본 경치와 비슷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알파마 지구에서 리스본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고 싶으면 고만고만한 전망대보다는 상 조르주 성 성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는 한국인도 더러 있다.
심지어 해물밥집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점심을 먹었던 한국인 여성 두 명도 마주쳤다.
비슷한 여행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이니 동선도 비슷한 듯.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지근거리인 산타루치아 전망대로 방향을 틀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바로 산타루치아 전망대다.
굳이 전망대 이름을 달리 쓸 이유가 있나 싶을 만큼 가까운 곳. 근데 전망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복닥대는 좁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와 달리 산타루치아 전망대는 앞에 공원을 끼고 있어서 제법 널찍하고 여유롭다. 전망대의 기다란 난간 벽은 아줄레주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또 다른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근데 냄새가..분위기가..오래 있고 싶지 않은 곳이다.
째릿하게 풍겨오는 소변냄새 때문에 피곤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벤치에 앉을 염이 없다.
경치나 보자 싶어 전망대 난간 쪽으로 다가가니 '관광객 꺼져'라고 조잡하게 휘갈긴 낙서가 보인다.
바로 돌아섰다.
두 전망대 모두 굳이 안 와도 될 곳이다 싶은데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들 저마다의 여행 취향이 있는 것이리라. 넘쳐나는 여행정보가 자가발전하며 만드는 유명세도 한몫하겠지.
갈증도 나고 피곤하니 시원하고 달달한 것이 땡긴다.
전망대 근처에 있는 야외 카페로 갔다.
무료로 이용가능한 공중 화장실도 카페 바로 옆에 있다.
알파마 지구를 걷다가 화장실이 급하면 산타루치아 전망대로 가면 된다.
레모네이드 한 잔과 모히또 한 잔을 주문하고 얼음이 채 녹을 새도 없이 주욱 들이켰다.
피로와 갈증이 싸악 가실 만큼 꽤 시원하고 맛있다.
배터리가 칸칸이 충전되듯 다시 기운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여튼 뭔가 맛있는 걸 먹고 나면 체력과 멘털이 아울러 정비되고 다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알파마 지구에서의 마지막 일정.
비카 푸니쿨라를 보러 가는 길.
방향을 잡고 인적 드문 널찍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로 뒤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발소리는 딱히 들리지 않는데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
힐끗 뒤돌아보니 키가 아주 큰 남자 한 명이 바로 뒤에 거의 붙다시피 따라 걷고 있다.
도로를 낀 넓은 길이라 비켜가도 되건만 왜 굳이.
갑자기 기분이 싸하다.
내 오른쪽 어깨에 달랑달랑 메고 있는 가방이 신경 쓰인다.
딸에게 '혹시 날치기 같은?'이라고 소곤 말했더니, 왜 그런 날치기당하기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냐고 오히려 타박이다.
그래, 나도 어깨를 가로질러 가슴앞쪽에 딱 붙이고 다니는 작은 가방을 메고 다니면 편하고 가볍지.
근데 우산이며 물병이며 패딩조끼 등등을 두리뭉실 넣어 다니려면 이 정도 가방은 들고 다녀야 된다고.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그 남자랑은 조금 더 먼 쪽인 왼쪽 어깨로 휘릭 돌려서 맸다.
뒤만 신경 쓰면서 가방을 휘릭 돌리는데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가방이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이랑 부딪혔다.
그 서슬에 내 몸이 홱 틀어질 정도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눈이 휘둥그레진 남자 한 명이 잔뜩 화난 표정으로 노려본다.
부라린 눈이며 허연 얼굴이 할리우드 배우 '제레미 레너'처럼 생겼다.
" 아임 쏘 쏘리~"
진심 어린 사과가 절로 나왔다.
가방에 부딪힌 그 남자, 갑자기 엄지 손가락 두 개를 올려 세우더니 " 굿!"이라고 말한다.
내 영어발음이 그렇게 좋았나??
바로 그때, 그 상황에도 여전히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의문의 키 큰 남자.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틀더니 도로를 가로질러 언덕 아래 내리막길로 긴 다리를 겅중대며 빠르게 뛰어내려 간다. 내 가방이 누군가를 치고 사과를 하는 상황에 비로소 자신의 갈길이 막 생각난 사람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에 호들갑을 떨 이유도 없고 추측과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잠재적 날치기범 취급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럼에도 내 가방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의문의 키 큰 남자가 내 가방을 낚아채고 가젤처럼 긴 다리로 겅중겅중 내리막을 내달렸다면..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여행 중에는 사람 많은 곳뿐 아니라 사람이 적은 곳도 아무쪼록 조심해야 한다.
얼마 걷지 않아서 사람들이 와글 모인 활기찬 곳이 나온다.
가파른 언덕 위에 서있는 노란색 푸니쿨라, 바로 비카 푸니쿨라가 보인다.
포르투갈 여행 책에서 많이 본 풍경이다.
샛노랗고 작은 푸니쿨라가 오똑 서있고, 운치 있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새파란 하늘과 테주강이 아주 살짝 감질나게 보이는 곳.
비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우중우중 줄을 서서 대기 중이다.
여긴 뭐 그냥 막 찍어도 기념엽서가 된다.
여성 한 명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혼자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있구나. 난 아직 그럴 용기가 없다.
사람들이 줄어들기를 기다려 어렵사리 사진을 찍고 나니 마침 비카가 운행할 시간이다.
비카를 타고 내려가면 우리의 다음 일정인 테주강변에 가까워질 듯하다.
비카에 탑승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앉을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리스보아 카드를 찍으려니 카드 태그하는 곳이 안 보인다.
순간 당황, 카드를 손에 든 채 푸니쿨라 운행 기사에게 물어보니 그냥 타면 된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퉁명스러운 공짜가 불편해서 도로 내렸다.
며칠 전에 탔던 글로리아 푸니쿨라 기사도 퉁명스럽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때는 내 돈 내고 탔으니 마음은 편했다.
천천히 내려가면서 이곳저곳 두루두루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늘이 리스본 마지막 날이잖아.
그렇게 여유만만 호기롭게 걸어 내려가는 길.
이후 여정인 테주강 강변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걸음걸음이 그렇게 대책 없이 길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다리가 터덕 터덕 움직일 즈음, '그냥 비카를 타고 내려올 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