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무조건 하고 철이 바뀌기만,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병약했던 김유정은 어서 가을이 오기만을 바랐다. 그가 앓던 폐결핵에는 무더위 만큼 해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글을 쓴 이유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이에 그는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밤낮으로 방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 단조롭고, 무료한 삶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착박(窄迫, 매우 좁음)한 방구석에서 빈대에 뜯기고, 땀을 쏟고, 이렇게 하는 피서는 그리 은혜로운 생활이 못 된다.
그런 까닭에 김유정은 어서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또한, 가을이 되면 병이 어느 정도 회복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김유정은 가을에 관한 두 편의 글(산문)을 남겼다. ‘나와 귀뚜라미(원제 : 나와 귀뚜람이)’와 ‘밤이 조금만 짧았다면(원제 : 밤이 조금만 잘럿드면)’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두 편의 글에 드러나는 분위기는 매우 대조적이다. ‘나와 귀뚜라미’가 가을에 대한 기대감이 넘쳐흐른다면, ‘밤이 조금만 짧았다면’ 현실에 대한 고달픔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1936년 정릉 암자에서 요양 중이던 김유정은 폐결핵으로 부쩍 쇠약해진 몸과 절망감의 절정에서 “일즉이 부모를 여읜 것이 차라리 행복”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릴 수 없는 상황, 조카의 도움으로 배변과 세수, 식사를 하고, 설사와 변비를 걱정하는 동안 그의 병환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를 통해 당시 그가 느꼈을 우울과 절망이 얼마나 깊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김유정은 ‘나와 귀뚜라미’에서 한밤중에 기침 발작으로 깨어났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살고 싶지도 않지만, 또한 죽고 싶지도 않은 것이 나의 오늘이다.
생각건대, 이 말이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 때문에 세상살이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잊혀지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같은 폐결핵을 앓던 이상의 자살 제의를 거절하면서까지 삶의 끈을 붙잡고자 했다. 하지만 김유정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쑤시고, 피를 한움쿰씩 토하는 순간까지도 매일 밤을 지새가며 글을 썼다. 작품을 통해서나마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유정의 글에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복잡한 마음이 드러나는 이유 역시 거기서 비롯되었다.
폐결핵에는 삼복더위가 끝없이 얄궂다. 산의 녹음도 좋고, 시원한 해변이 그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착박(窄迫)한 방구석에서 빈대에 뜯기고, 땀을 쏟고, 이렇게 하는 피서는 그리 은혜로운 생활이 못 된다.
야심(夜深)하여 홀로 일어나 한창 쿨룩거릴 때면 안집은 물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서 ‘끙’하고 돌아눕는 인기척을 가끔 들을 수 있다. 이 몸이기에, 이 지경이라면, 차라리 하고 때로는 딱한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살고 싶지도 않지만 또한 죽고 싶지도 않은 것이 나의 오늘이다. 그래, 무조건 하고 철이 바뀌기만,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가을이 오면 밝은 낮보다 캄캄한 명상의 밤이 귀엽다. 귀뚜라미 노래를 들을 때 창밖의 낙엽은 은은히 지고, 그 밤은 나에게 극히 엄숙한 그리고 극히 고적한 순간을 가져온다. 신묘한 이 음률을 나는 잘 안다. 낯익은 처녀와 같이 들을 수 있다면 이것이 분명 행복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수에 넘는 허영이려니, 이번 가을에는 귀뚜라미가 부르는 노래나 홀로 근청(謹請)하며, 나는 건강한 밤을 맞아보리다.
ㅡ 김유정, ‘나와 귀뚜라미’ 중에서
… (상략) …
아, 내게 왜 돈이 없나 싶어 부질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친구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고 읽어보니, 그 자자구구에 맺힌 어리석은 그의 순정이 내 가슴을 마구 때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엄숙히 암시해주는 듯해 우정을 넘어선 그 뭔가를 느꼈다. 결국, 감격 끝에 눈물을 머금고 말았다.
며칠 후, 그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 편지를 고이 접어두련다. 이것이 그에게 보내는 나의 답장이다.
그의 주머니에 이 편지를 다시 넣어 주리라 마음먹고 봉투에 편지를 넣어 이불 밑에 깔아두었다. 지금 내게는 한 권의 성서보다 몇 줄의 이 글발이 지극히 더 은혜롭고, 갈수록 거칠어가는 매 감정을 매만져주는 것이니, 그것을 몇 번 거듭 읽는 동안 더운 몸이 점차 식어가고 있음을 느끼었다.
램프의 불을 낮추고 어렴풋이 눈을 감아본다. 그러다가 허공에 둥실 높이 떠올라 중심을 잃고 몸이 삐끗하였을 때, 그만 아찔하여 눈을 떠보니, 석 점(새벽 세 시)이 되려면 아직 5분이 남았다. 넓은 뜰에서 허황히 뒹구는 바람에 법당 안의 풍경이 은은히 울려온다.
아아, 가을밤은 왜 이리도 깊을까. 더디게 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ㅡ 김유정, ‘밤이 조금만 짧았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