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인 송몽규다. 3개월 간격으로 같은 집에서 태어난 두 사람의 인연은 명동 소학교, 대립자 현립 1교, 용정 은진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시절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나란히 죽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졌다.
송몽규는 눈물 많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윤동주와는 달리 소년 시절부터 매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했다. 두 사람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간도 삼총사’로 불렸던 고 문익환 목사에 의하면, 윤동주는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선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품었다고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윤동주를 만든 팔 할은 송몽규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1월 1일, 송몽규가 <술가락(숟가락)>이라는 작품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분에 당선되자, 자극을 받은 윤동주는 본격적으로 습작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작품마다 창작연월일을 기록했다. 송몽규의 등단이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하지만 송몽규는 전도유망했던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독립군의 길을 걷는다. 생각건대, 그것이 시인을 더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불의와 부조리에 행동으로 맞서는 송몽규와 그렇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비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인에게 있어 송몽규는 평생의 벗이자 라이벌이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인 유영 전 연세대 교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추억한 바 있다.
“동주와 몽규는 마치 쌍둥이 같았다. … (중략) … 그런데 성격은 완전 반대였다. 동주는 얌전하고 말이 적고 행동이 적은 데 반해, 몽규는 말이 거칠고 떠벌리고 행동반경이 컸다. 그러면서 시를 같이 공부하고, 창작도 같이하였다. 그러한 성격은 시에서도 나타나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