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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Jun 27. 2020

평안도 출신 김남천의 ‘소울 푸드’ 평양냉면

─ 김남천, <냉면>




◆ 김남천과 이효석 평양냉면을 두고 벌인 논쟁


냉면이 본래 겨울 음식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 입맛을 돋우는 데 냉면만한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냉면을 먹었을까.


18세기 후반 평양 모습을 그린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대동문, 부벽루 등 명승지와 함께 '냉면가라고 표기된 냉면집이 등장한다. 이 무렵 평양을 여행한 실학자 유득공이 가을이면 “평양의 냉면과 돼지 수육값이 오르기 시작한다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 냉면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냉면 마니아들은 평양냉면을 최고로 친다. 멀건 육수가 잃어버린 입맛과 추억을 돋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밍밍하고 심심한 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평양냉면을 두고 평안도 출신의 김남천과 강원도 출신 이효석은 서로 다른 글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가 나기도 전부터 냉면을 먹었다는 평안도 출신 김남천의 평양냉면 자랑은 고집스럽기까지 하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평양냉면)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 (중략) … 서울서 횡행하는 국수(냉면)는 유사품일 뿐이다. 그러니 평양냉면이나 메밀국수와는 친척 간이나 되나마나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안도 출신인 김남천에게 냉면은 소울 푸드였다. 그러니 입맛이 없을 때면 가장 먼저 냉면 생각이 났고, 술을 먹은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냉면으로 해장을 했. 이래저래 그에게 냉면은 최고의 음식이었던 셈이다. 이에 반해 강원도 출신인 이효석은 평양냉면의 깊은 맛을 알지 못했다. 이에 <유경식보>라는 글에서 평양냉면에 이렇게 말했다.


“평양에 온지 사 년이 되나 자별스럽게 기억에 남는 음식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중략) …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질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김남천과 이효석이 어색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던 친구였다. 이효석이 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찾은 이도 김남천이었다.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였다.



▲ 평양냉면을 두고 글을 통해 다툼을 벌였던 김남천(왼쪽)과 이효석.



◆ 193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소설가, 김남천의 ‘소울 푸드’ 평양냉면


사실 우리에게 ‘김남천’이란 이름은 매우 낯설다. 소설가·평론가로 활동했던 그는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 이름조차 언급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이름 한 글자를 지우고 언급했을 정도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름을 되찾고 전집이 출간되는 등 재조명되고 있다.


김남천은 글의 전개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을 구사했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실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소설을 썼는가 하면, 당시로는 낯선 용어를 총 동원해가며 날선 비평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쓴 소설 속의 여주인공에게 여행을 가자며 편지를 쓰는 기발한 발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뛰어난 소설가요, 평론가였지만, 불행한 선택으로 인해 우리에게서 잊혀진 작가가 되고 말았다.  


시인 임화와 함께 카프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김남천은 현장성 강한 운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 때인 1931년 8월 2년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1933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아내가 두 딸을 남겨둔 채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냉면>은 1938년 5월 31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작품으로,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일깨우는 것은 물론 글을 쓰는 원동력이 냉면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냉면’이라는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이라야 비로소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냉면은 평양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들의 입맛과 기호에 맞는 음식이 되었는지는 나 같은 무식쟁이로서는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다.  

어린 시절 우리가 냉면을 국수라고 하여 비로소 입에 대게 된 것을 기억하는 평안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밥보다도 아니, 쌀로 만든 음식보다도 일찍 나는 이 국수 맛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어른들의 냉면 그릇에 여남은 가닥 남은 국수오리(국숫발), 즉 메밀로 만든 이 음식을 서너 개 있을까 말까 한 이로 끊어서 삼킨 것이 아마도 내가 냉면을 입에 대본 첫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젖 먹다 뽑은 작은 입으로 이 매끈거리는 국수오리를 감물고(입술을 감아 들여서 꼭 묾) 쭐쭐 빨아올리던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누가 마을에 올 때 점심이나 밤참으로 반드시 이 국수를 먹던 것을 나는 겨우 기억할 따름이다.

잔칫날, 즉 약혼하고 편지 부치는 날과 예물 보내는 날, 장가가는 날, 며느리 데려오는 날, 시집가고 보내는 날, 장가 와서 묵고 가는 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 국수가 출동했다. 그밖에도 환갑날, 생일날, 제삿날, 장례식 날, 길사, 경사, 흉사에도 냉면이 나왔다.

특이한 것은 이 국수를 때로는 냉면으로, 때로는 온면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월 열나흘 작은 보름날에 이닦기엿, 귀밝이술과 함께 수명이 국수오리처럼 길어야 한다고 ‘명길이국수(국수가 길듯이 오래 살 수 있다는 뜻에서 해 먹던 국수)’라 이름 지어서까지 냉면 먹을 기회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평안도 사람의 단순하고 담백한 식도락을 추상(抽象,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함)할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속이 클클한(뱃속이 좀 빈 듯하고, 목이 텁텁하여 무엇을 시원하게 마시거나 먹고 싶은 생각이 있음) 때라든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럴 때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이렇게 될 때 이 국수는 확실히 술 대신이다.

나처럼 술잔이나 다소 할 줄 아는 사람도 속이 클클한 채 멍하니 방 안에 처박혀 있다가 불현듯 냉면 생각이 나서 관철동이나 모교 다리 옆을 찾아갈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차나 마시러 갈까?” 하면,

“여보, 차는 무슨 차, 우리 냉면 먹으러 갑시다.”

하고, 앞장서서 냉면집을 찾았다.

모든 자유를 잃고, 음식 선택의 자유까지 잃었을 경우,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그러고 보면 냉면이 우리에게 주는 은연함(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함)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이하 하략) …

─ 김남천, <냉면> 중에서






※ 위 글에 나오는 김남천의 <냉면>은 다음 도서를 참조했습니다.

    <녀름입니다, 녀름/ 루이앤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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