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 <수박>
술도 잘 마시지 못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즐기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계용묵이 유일하게 즐겼던 것은 ‘낚시’였다. 그는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낚시를 즐겼다. 얼마나 심취했으면 ‘나는 창작도 잊었소. 독서도 잊었소. 아니, 침식(寢食)까지 잊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화가 김환기 역시 그의 낚시 동료 중 한 명이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지만, 김환기 역시 한때 문학을 전공할 만큼 글쓰기를 좋아하고, 실력 역시 뛰어나 미술이나 일상에 관한 생각을 꾸준히 일기로 남기기도 했다. 이에 함께 어울리며 밤이 깊도록 문학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피난 다니면서 전람회를 다 열고, 참 장하오. 나는 제주 일 년에 무엇을 했는지 그 잘난 작품 나부랭이 하나 만들지 못하고 노상에서 세월을 보냈구려. 형의 정열이 참 부럽소. 그래, 몇 점이나 내놓았던 것이오? 제목은 다 형의 독특한 시였겠지요? 나는 형의 개전(個展)을 볼 때마다 그 제목에 늘 깊은 인상을 받으오.”
─ ‘계용묵이 김환기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흔히 ‘인생파 작가’로 불리는 계용묵은 초기에 식민지 시대의 궁벽한 현실을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삶을 주로 다뤘다.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유랑민으로 전락한 소작인을 그린 <최서방>이나 탄광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불구의 몸이 된 주인공을 등장시킨 <인두지주>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가 <백치 아다다>를 기점으로 소박한 인간적 가치에 주목하는 작품을 쓰기 시작해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등 소외된 자들에 대한 연민을 작품에 담았다. <백치 아다다>가 시공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계용묵의 글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담백하고 솔직하며 희극적이다. 그의 대표적인 수필 작품인 <구두>에서도 그런 성격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마치 한 편의 콩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 곁 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하게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웅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 딱 땅바닥을 박아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가 한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모양까지 칭송한 글이 있다. 1949년 7월 《국도신문》에 게재한 수필 <수박>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수박은 고고하며, 올곧은 과일이라고까지 했다. 과연, 수박의 무엇이 그를 그렇게 사로잡은 것일까.
입맛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겠지만, 여름 과일로는 아무래도 수박만 한 것이 없다. 맛으로 친다고 해도 수박은 참외나 다른 그 어떤 과일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생긴 품위로 봐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일도 수박을 따르지 못한다. 그 중후한 몸집에 대모(玳瑁, 바다거북의 등딱지) 무늬의 엄숙하고 점잖은 빛깔이 교양과 덕을 높이 쌓은 차림새 같은 고상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감미로운 맛을 새빨갛게 가득 지닌 그 속살은 교양과 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새빨갛게 속이 물드는 과일이 어디 수박뿐이랴 만, 수박의 그것은 다른 과일의 그것에 비해 빛의 성질부터가 다르다. 천진(天眞,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자연 그대로 깨끗하고 순진함)에 가까울 만큼 순한 빛이요, 연한 살이다. 따라서 자연에서 나는 제품 가운데 수박이야말로 가장 예술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수박을 좋아하는 것도 실은 이 예술적인 풍미에 있다. 그래서 나는 수박을 미각으로만 즐길 것이 아니라 시각으로도, 취미로도 즐기고 싶어 시골에서 살 때 채원(菜園, 채소밭)에다가 수박을 손수 심고 가꾸며 어루만진 적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듯 수박을 가꾸는데도 여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재배법을 들여다보며 꼭 그대로 하는데도 제대로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참외는 맺히기만 하면 그 결실을 볼 수 있건만, 수박은 그렇지 않았다. 맺혔다가도 곧잘 떨어지고, 한창 크다가도 밑자리가 위태로워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손만 좀 대도 금방 손 냄새를 맡고는 앓곤 한다. 자연 이외의 접촉은 일절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수박이야말로 자연이 준 지조를 충실히 지키는 과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고상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박은 탐나는 미각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달고 시원하면서도 그 깨끗한 맛이란 여름 과일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적당히 익어서 땅바닥에 닿았던 부분이 누렇게 되고, 두들겨 봐서 북소리가 나는 놈만 골라 들면, 그야말로 여름이 아니고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일미 중의 일미다. 그러나 시장에 나와 있는 것 중에는 그런 게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돈벌이를 위해 다량 생산하고, 인공을 가해 자연을 모독해서 성숙시킨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수박 본래의 맛 역시 나지 않는다. 심지어 속을 붉게 만드느라 채 자라지 않은 작은 과일에 붉은 물감 주사를 놓은 것도 많다고 하니, 어쩌면 한평생 수박의 제맛을 모르고 지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시인의 흥을 돋우고,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박. 오늘에 와서 그 맛이 이렇게 변질이 되고 만다는 건 여름의 미각을 위해서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 계용묵, <수박> 중에서
※ 위 글에 나오는 계용묵의 <수박>은 다음 도서를 참조했습니다.
─ <녀름입니다, 녀름/ 루이앤휴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