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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Jun 28. 2020

시인 백석 밥상의 단골 손님 ‘가자미’

─ 백  석, <가재미>





◆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가, 백석과 최고의 시집 《사》의 탄생


1936년 1월 20일, 서른 세 편의 시가 실린 한 권의 시집이 출간된다. 100부 한정판(발행가 2원)으로 출간된 시집은 곧 수많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의 마음을 흔든다. 시인 백석의 전설적인 시집 《사슴》의 탄생이었다. 주목할 점은 시집 뒤편에 저작 겸 발행자가 백석으로 명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낯설고 질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가득한 그를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기에 자비로 시집을 펴낸 것이다.

 

백석 ‘한국 문학의 북극성’으로 불린다. 남겨진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분단 뒤 북에서 살았던 터라 그에 대한 연구 역시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작품은 언제나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집을 빌리지 못해 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필사한 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는가 하면, 신경림은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은 저녁, 밥도 반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들에 대한 수많은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집으로 《사》이 꼽혔.


시 <떠나가는 배>를 쓴 시인 박용철은 《사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시집의 가치는 이 시편들이 울려 나오기를 토속학적 취미에서도, 방언 채취의 기호에서도 아닌 점에 있다. 외인(外人)의 첫눈을 끄으는 이 기괴한 의상(衣裳) 같은 것은 모든 이 시인의 피의 소곤거림이 언어의 외형을 취할 때에 마지못해 입은 옷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감득할 수 있는 진실한 매력과 박력이 이 증좌(證左)다.”

─  박용철,《조광》 1936년 12월호  ‘시단 일 년의 성과’ 중에서


▲ 조선 최고의 모던보이였던 백석과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했던 그의 시집 《사슴》의 초판본.



◆ 읽을수록 침이 고이는 백석의 시


1912년 7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매우 서구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모던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명은 ‘기행’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으로도 불렸다. 우리가 부르는 ‘백석’은 그의 필명이다.


그의 글에는 수많은 음식이 나온다. 시에 나오는 음식 종류만 해도 자그마치 100여 개가 넘는다. 맨모밀국수, 흰밥과 가재미, 수박씨, 호박씨, 무이징게국, 달재 생선, 붕어곰, 송구떡, 섞박지, 매감탕…. 하나같이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음식이다.


음식에 대한 그의 철학이 특히 도드러지는 작품은 시  <국수>이다. 여기서 그는 국수 준비하는 일을 ‘반가운 것이 온다’라고 표현할 만큼 국수를 친근한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  석, <국수> 중에서



◆ “흰밥과 가재미만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으로 나도 좋아”


백석은 가자미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음식과 관련 된 그의 시에는 대부분 가자미가 등장하며, 이는 그가 쓴 신문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하기야도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시케(식혜)에 들어 절미지.”

─ 1938년 6월 7일, 《동아일보》 기사 중에서


이 기사는 현재까지 확인된 회국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가자미는 구이뿐 아니라 회, 조림, 찜까지 다양하게 즐긴다. 특히 북쪽에선 살과 뼈가 연한 물가자미로 식해(생선과 밥, 양념 등을 버무려 삭힌 음식)를 만들어 먹었는데, 6·25전쟁 이후 피란민(난리를 피해 가는 사람)들이 남쪽에 전파했다. 특히 회냉면의 원산지 함경도에선 감자 전분으로 뽑은 면 위에 가자미를 올렸다.


생각건대, 백석은 그맛을 잊지 못한 듯하다. 이에 <선우사(膳友辭ㆍ음식 친구에 관한 글)>라는 시에서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가자미는 고향이자 소울푸드였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백석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침이 고인다.

 



동해 가까운 거리로 와서 나는 가재미와 가장 친하다. 광어, 문어, 고등어, 평메(바닷물고기의 종류), 횃대(홍치. 주로 식해를 담아 먹는다)… 생선이 많지만 모두 한두 끼에 나를 물리게 하고 만다.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만이 흰밥과 빨간 고추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나는 이 가재미를 처음 십 전 하나에 뼘가웃(손 한 뼘보다 조금 큰 것)식 되는 것 여섯 마리를 받아들고 왔다. 다음부터는 할머니가 두 두림(물고기를 한 줄에 10마리씩 두 줄로 엮어 20마리씩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두름’의 함경도 방언) 마흔 개에 이십오 전씩에 사 오시는 데 큰 가재미보다도 잔 것을 내가 좋아해서 무두(모두) 손길만큼 한 것들이다. 그동안 나는 한 달포 이 고을을 떠났다 와서 오랜만에 내 가재미를 찾아 생선장으로 갔더니 섭섭하게도 이 물선(物膳, 음식을 만드는 재료)은 보이지 않았다. 음력 8월 초상(초순)이 되어야 이 내 친한 것이 온다고 한다. 나는 어서 그때가 와서 우리들 흰밥과 고추장과 다 만나서 아침저녁 기뻐하게 되기만 기다린다. 그때엔 또 이십오 전에 두어 두림씩 해서 나와 같이 이 물선을 좋아하는 H한테도 보내어야겠다.

─ 백  석, <가재미> 중에서






※ 위 글에 나오는 백석<가재미>다음 도서를 참조했습니다.

     ─ <녀름입니다, 녀름/ 루이앤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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