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효석, <유경식보>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제나 사람이 죄악에서 구원될까 ─ 가 아니라 고독에서 구원될까 ─ 하는 것이 제게는 하나의 종교적인 초려(焦慮)가 됩니다. 참으로 쓸쓸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평양에 온 지 사 년이 되었으나 자별하게(남다르고 특별함) 기억에 남는 음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의 전반 규모에 그 무슨 전통의 아름다움이 있으려니 해서 몹시 눈을 살피나 종시(終是, 끝내) 그런 것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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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자랑은 국수가 아니고 만두여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한 친구는 이른 봄에 여러 번이나 간장병과 떡 주발(놋쇠로 만든 밥그릇), 김치 그릇을 날라다 주었는데, 그 김치 맛이 참으로 일미(一味, 첫째가는 좋은 맛)여서 어느 때나 구미가 돌지 않을 때면 번번이 생각나곤 합니다. 봄이건만 까딱 변하지 않는 김치의 맛, 시원한 그 맛은 재찬삼미(再讚三味, 두 번 칭찬하고 세 번 맛볼 만큼 맛있음)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대체로 평양의 김치는 두 가지 격식이 있어 고추 양념을 진하게 하는 것과 엷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의 소금만으로 절여서 동치미같이 희고 깨끗하고 시원한 것, 이것이 그 일미의 김치인데, 한 해(어느 해) 겨울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휩쓸려 밤늦도록 타령을 하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김에 밤늦게 그 친구 집을 습격해서 처음 맛본 것이 바로 그 김치였습니다. 다해서 두 칸밖에 안 되는 방에 각각 부인과 일가 아이들이 누워 있었던 까닭에 친구는 방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대문 옆 노대(露臺, 지붕이 없이 판자만 깔아서 만든 자리)에 벌벌 떠는 우리를 앉히고 부인을 깨워 일으키더니 대접한다는 것이 찬 김치에 만 밥, 소위 짠지밥 ─ 김치와 짠지는 다르지만, 평양에서는 일률로 짠지라고 일컫습니다 ─ 이었습니다. 겨울에 되레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더니 찬 하늘 아래에서 벌벌 떨면서 먹은 김치의 맛은 취중의 행사였다고는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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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죽 또한 으뜸입니다. ‘물고기 죽’이란 말이지만, 실상은 물고기보다도 닭고기가 주재료가 되는 듯합니다. 닭과 물고기로 쑨 흰죽을 고추장에 버무려 먹습니다. 여름 한 철의 진미로서 아마도 천렵의 풍습의 유물로 끼쳐진 것인 모양입니다. 제철에 들어가 강 놀이가 시작되면 반월도(半月島, 평양 대동강가에 있는 섬)를 중심으로 섬과 배 위에 어죽 놀이의 패가 군데군데에 벌어집니다. 물속에서 첨벙거리다가 나와 피곤한 판에 먹는 죽의 맛이란 결코 소홀히 볼 것이 아닙니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홍합죽이라는 것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조개로 쑨 죽과 맛이 흡사합니다. 피곤함을 덜어주는 것이 구미(口味, 입맛) 없는 여름 음식으로는 이 죽들이 확실히 공이 큰듯합니다.
─ 이효석, <유경 식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