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준, <이동 음식점>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 월북 후 북한의 대표적인 미술이론가로 활동, 한국 수필문학의 정수로 불리는 《근원수필》을 쓴 작가이자 교육자, 미술사가, 장정가….
근원 김용준의 이력을 장식하는 용어들이다. 그는 한국예술사에서는 드물게 남과 북에서 동시에 일세를 풍미했으며, 화가, 비평가, 사학자 그리고 문학가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1948년, 그가 수필집 《근원수필》을 내자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글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았다.
그의 본업은 화가였다. 1946년 서울대 미대를 탄생시킨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그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존경받는 스승이자,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어른이었다. 이에 그는 한때 벗들이 책을 출간할 때 표지 디자인을 해주기도 했다. 이태준의 《달밤》, 《복덕방》, 홍명희의 《임꺽정》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월북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한동안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을 정도였다.
김용준은 1934년 소설가 이태준이 늙은 감나무가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인 서울 성북동 노시산방(老枾山房)으로 거처를 옮긴 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이태준이 철원으로 떠나자 그 역시 노시산방을 팔고 의정부로 이사했다.
김용준에게서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이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 김환기였다. 그와 관련해서 김용준은 《육장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좋은 친구 수화(김환기)에게 노시산방을 맡긴 나는 그에게 화초들을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의정부에 새로 마련한 작은 오막살이집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 (중략) … 순수하다는 것을 정신의 결합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이 정신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종교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에서뿐이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을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아홉 살 차이였던 두 사람의 가는 길은 달랐지만, 우리 미술에 대한 열망은 같았던 것이다. 투명한 예술혼을 담고자 했던 두 사람이 얼마나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는지 김용준이 쓴 글에서 알 수 있다.
“수화의 그림이나 글도 필경 싱겁기 짝이 없으려니 했더니 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화(畵)와 문(文)은 감각이 예리하고 색채가 풍부하고 범속한 데서 한층 뛰어난 짓을 곧잘 한다.”
─ ‘키다리 수화 김환기’ 중에서,《주간서울》 1949년 10월 17일자
그는 “수필이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라며, “마음속에 부글부글 괴고만 있는 울분을 어디 호소할 길이 없어 가다오다 등잔 밑에서, 혹은 친구들과 떠들고 이야기하던 끝에 공연히 붓대에 맡겨 한두 장씩 끄적거리다 보니 그게 그만 수필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기실 그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가 쓴 글 중 <이동 음식점>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포장마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매우 낯설고 신기했던 모양이다. 주목할 점은 ‘이 집에는 계급의 구별도 없다’라는 구절이다. 기실, 이것이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었던 듯하다.
서울은 재미난 도시다. 골동품 같은 집이 있다.
남의 원장(垣墻, 담장)에 기댔을망정, 쓰레기통 옆에 놓였을망정 아담한 차림새로 구중궁궐 부럽잖게 꾸밀 대로 꾸미기도 했다. 추녀 끝에는 방울 같은 새를 앉히고 납작한 완자창(창문의 창살을 卍자 모양으로 만든 창으로, 중국 발음에서 유래)도 달았다. 쌍희자(雙喜字, 그림이나 수놓는 데 많이 쓰는 ‘囍’의 이름)를 아로새긴 세렴(가는 대로 촘촘하게 엮은 발)도 늘였다.
이 집에는 떡국도 팔고, 진짜 냉면도 있다. 맛 좋은 개장국도 한다. 노동자 빈민은 물론 한다 하는 신사도 출입을 한다. 이 집에는 계급의 구별도 없다. 땅바닥에는 검둥이란 놈이 행여 동족의 뼈다귀나 한 개 던져줄까 하고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기다리고 있다.
이래 봬도 하루의 수입이 물경 만 원을 넘기는 것은 누워 떡 먹기다. 더구나 이 집의 재미난 것은 주추(땅 위에 놓아 기둥을 받쳐주는 구실을 하는 것) 대신에 도롱태(사람이 밀거나 끌게 된 간단한 나무 수레)를 네 귀에 단 것이다.
아무 때나 이동할 수 있다. 순경 나으리가 야단을 치는 날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훨훨 몰아갈 수 있다.
주인 부처(夫妻, 부부)는 진종일 영감 그린 종이를 모으기에 눈코 뜰 새 없다가 도시의 소음이 황혼과 함께 스러진 뒤 참새 보금자리 같은 이 집 속에서 신화 같은 이야기를 도란거리다가 고요히 꿈나라로 들어가고 만다.
재민(災民, 이재민. 즉, 재해를 입은 사람)들은 이렇게 가지각색으로 살고 있다.
─ 김용준, <이동 음식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