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아침에 눈 뜨면 내 방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해 떨어지면 또 나를 찾는다. 일과를 마치면 내게 달려오고, 내가 집에 없으면 한참을 기다린다. 이토록 타인에게 절실한 존재가 되다니, 나도 내가 놀랍다.
온 힘으로 날 그리워하는 이 존재가 아름다운 여인이면 참 좋겠으나, 그렇게 완벽한 행운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늦은 밤 내 발자국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설치는 이 사람은 남자, 산골 분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4학년 영훈(가명)이다. 옆집에 사는 아이다. 영훈이가 애타게 나를 찾는 핵심 이유, 낚시 때문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영훈이는 2학년 때 지리산 피아골의 작은 분교로 '산촌 유학'을 왔다. 2015년 봄 지리산에 든 나보다 귀촌 선배인 셈이다. 산과 들과 계곡을 누비며 본격적으로 시골아이로 거듭나야 했지만 영훈이 곁에는 '촌놈 서포터즈'가 없었다. 지리산은 영훈이에게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냇가를 주었으나 많은 친구까지는 선물하지 않았다.
날이 더운 요즘 영훈이는 피아골 계곡에서 살다시피 한다. 엄마와 다슬기를 잡거나 헤엄을 친다. 나를 만나기까지 그랬다. 내가 낚싯대를 들고 계곡에 등장했을 때 영훈이의 입은 떡 벌어졌다. 녀석은 아마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다슬기 '채집'에서 곧 물고기 '수렵'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것이란 걸 말이다.
처음 영훈이는 낚싯대 만지기를 주저했다. 내가 가짜 미끼를 이용해 꺽지를 잡아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녀석의 눈빛은 '나도 해보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다음 날에도 우린 계곡으로 갔다. 영훈이에게 낚싯대를 쥐여주고 꺽지 잡는 방법을 알려줬다. 녀석은 어제와 달리 빼지 않고 과감하게 낚시에 도전했다. 영훈이는 몇 번의 시도 만에 꽤 큰 꺽지를 잡았다. 영훈이는 그 꺽지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렸다.
"엄마! 나 잡았어! 엄마~! 나 잡았다니까!"
그렇게 수렵 인생이 시작됐다. 며칠 뒤 영훈이는 내가 한 번도 잡지 못한 대물 꺽지를 잡았다. 녀석의 눈빛은 확 달라졌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당구에 처음 빠져들었을 때, 여자 친구와 처음 키스했을 때 아마 내 눈빛이 저랬지 싶었다. 얼마 뒤 영훈이는 내게 말했다.
"아저씨, 이제 꿈에 꺽지가 나와요. 학교 공부시간에도 계속 낚시만 생각나요."
녀석은 급기야 내게 '학교에 와서 방과후수업으로 낚시를 가르쳐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영훈이는 내 도움 없이 혼자 계곡에서 꺽지를 잡아 올리곤 한다. 아마도 한동안 녀석의 취미와 여가는 낚시가 될 듯하다. 낚시 기술 이전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영훈이는 해질녘 내가 산책에 나설 때면 종종 동행해준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빈손에서 생의 비밀을 알게 될 거다
사실 영훈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 앞의 생>의 꼬마 주인공 모모를 자주 생각했다. 영훈이와 모모는 나이는 비슷하나, 여러 조건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자기 앞의 생>과 모모를 떠올린 건, 이웃집 아저씨인 내 처지 때문이다. 옆집에 사는 어른으로서 낚시 말고도 다른 여러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모모는 자녀를 돌볼 수 없는 창녀의 버려진 아들로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아이들과 함께 로자 아줌마네 집에서 산다. 젊은 시절 창녀였던 로자 아줌마는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게 되자 창녀의 자식을 돌보며 살아간다. 모모는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이웃인 하밀 할아버지를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하밀 할아버지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없다고 모모에게 이야기하고, 모모는 그 말의 의미를 경험으로 알아간다.
사실 꼬마와 이웃 어른의 교감과 우정은 그동안 여러 문학,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그 중에서 내가 유독 <자기 앞의 생>을 생각한 건, 세상의 구석까지 몰린 상처받은 이웃들이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창녀의 버려진 아이들, 이들을 보살피는 전직 창녀 로자 아줌마, 볼로뉴 숲에서 자기 몸을 팔아 이들 모두를 돕는 롤라 아줌마, 로자 아줌마의 건강을 위해 '불쇼'도 마다하지 않는 왈룸바, 여기에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하밀 할아버지…. 마지막 순간에도 서로를 밀쳐내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우정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에서 모모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떤 아저씨에게 이런 말을 한다.
"로자 아줌마는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구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에요. 다행히 내가 지내면서 돌봐주고 있어요.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왜 세상에는 못생기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에, 서로를 돌봐줘야만 했던 사람들의 선택. 진짜 좋은 사랑, 우정은 그런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삶에서 나오지 싶다.
내가 낚시를 가르친 덕에 영훈이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질녘이면 지리산을 적시는 노을을 보며 함께 걷는다고, 나와 영훈이 사이에 우정이 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정이나 사랑 같은 건, 웃음이 아닌 눈물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니까. 나와 영훈이의 우정은 서로의 가슴속에 웅크린 상처를 확인한 후의 일일 것이다.
영훈이에게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식의 건방진 생각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녀석은 자연스런 내 일상을 보면서 배울 게 있다면 알아서 배울 것이다. 영훈이 덕분에 <자기 앞의 생>을 세 번째 읽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읽었을 때보다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명작이다. 책 좀 읽었다고 '꼰대'처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영훈이는 월척을 낚을 때의 손맛이 아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의 그 공허한 마음과 쓸쓸한 기분 속에서 생의 여러 비밀을 스스로 알아차릴 것이다. 많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낚아 올리길 바란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니까. 외롭고 쓸쓸해야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