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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Apr 08. 2021

피프티 피플

주인공이 없는, 혹은 모두가 주인공인 50인의 이야기



정세랑 지음


가볍게 차 한잔 하듯 읽기 좋은 책
장편은 버거운 사람에게 추천!










주인공이 없는

혹은 모두가 주인공인 50인의 이야기

이 책은 무려 50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다양한 직업, 나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일상 한 부분을 캡처하여 글로 담은 기분이다.

어렸을 땐 빨리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프롤로그, 에필로그, 저자의 말 같이 책의 주 내용이 아니면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책을 쓴 작가가 어떤 환경, 어떤 생각, 어떤 상황에서 글을 썼는지 궁금해서 마지막 장까지 살펴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알게 됐다. 이 책은 사실 50명이 아니라 51명이라는 것을. 어쩌다 보니 51명이 되었다고 한다.


퍼즐.. 을 맞추다 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기 제목은 '모두가 춤을 춘다' 였다고 한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춤추거나 몸을 움직이는 장면들이 녹아 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어 에필로그 읽는 것이 재미있다.

소설이라 하면 언제나  사람만 특별해지고 타인은 쩌리가 되기 일쑤인데, 그에 지루함을 느낀 작가가 조금 결이 다른 소설을 써본  같다. 그래서 책의 형식이 살짝 새로웠다. 하지만 50번이나 끈기는 이야기에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나는 장편 체질인가 싶었다. 나의  성향을 고민해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관적 책갈피

51명 중 7명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중 송수정, 하계범이라는 사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송 수 정

시한부 암 판정을 받은 엄마를 둔 예비 신부이다. 엄마의 암이 빠르게 번져 결혼식을 당겨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 누구보다 호화로운 결혼식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엄마를 위한 결혼식이다.

결혼식을 가장한 장례식이다. 아주 근사한 장례식.



이 호

1940년생.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감염내과 전문의다.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인 것 같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이루었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 운이 좋았다.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나 덕분에 전쟁을 덜 참혹하게 겪었고, 아버지 직업 덕에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아내를 만난 것도 완전히 운이었다. 항생제를 잘못 처방받는 바람에 환자로 실려와 우연히 만났다. 미대생이었다.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기질이 부동산 투자에 도움이 되었다. 예뻐질 것 같다고 말한 동네는 정말로 예뻐졌고 비싸졌다.

인생이 이렇게 행운으로 가득할 리 없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일이 닥칠 것 같아 의료봉사를 떠난다.



홍 우 섭

소개팅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친한 동기가 거의 강요에 가깝게 주선해주었다. 지혜라는 여자와 소개팅을 했고 두 번 더 만났다. 잘될 줄 알았는데 그 이후 각자 바쁜 시기가 찾아왔고 흐지브지되어 더 만나지 못했다. 몇 년 뒤 창고형 마트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쳤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 다음이었다.

지혜가 먼저 우섭을 보고 인사했는데 갑자기 당황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걸로 보아 업무 관계로 만났던 사람인 줄 알고 아는 척하는듯했다. 우섭이 "거래처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하고 수습해주었다.

지혜가 눈으로 고마워했다. 짧은 마주침이었고 기분 좋은 마주침이었다.

인연의 반복과 스침 사이에서 묘한 재미와 감정을 느꼈다.



한 규 익

규익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이다. 큰 누나가 죽었을 당시엔 그게 원인인지 몰랐다. 규익은 게을러서 한두 번 쓰다가 말았다. 누나는 게으르지 않아서 죽었다. 곰팡이와 세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죽었다.

작은 누나가 말했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



임 찬 복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 외가 식구들 중 유독 어머니만 치매에 걸린 것이, 90세가 넘도록 정신이 또렷한 이모들은 동생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는 주변 사람들만 힘들고 본인은 편안한 병이라고 격려 삼아 이야기해도 찬복은 보았다. 머릿속에서 아주 간단한 생활 방식이, 이름이, 숫자가, 지도가 지워져 갈 때 어머니의 눈에 떠오르던 공포를. 손주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 당황해서 떨리던 손을.

찬복과 아내가 나중에 치매나 중병에 걸렸을 때 내 자식은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둘이 한꺼번에 병들면 감당이 될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 계 범

66세. 응급실에서 시체를 나르는 일을 한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따로 없어서 환자들이나 방문객들이 잘 쓰지 않는 구석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원래는 두 사람이 나누어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이 그만두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숙직실에 머물러 커버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모른 척하고 새 사람을 뽑아주지 않았다. 계범은 얼른 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가 잘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가족은 없었다. 가족 비슷한 게 있었던 건 거의 스무 해 전쯤, 잠시 동거하던 여자가 있긴 했으니 그야말로 잠시였다.

젊음. 기억나지 않는 젊음. 젊었을 때엔 분명 계범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시간이 친구들을 다 잡아먹었는지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몇은 세상을 떴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수첩을 뒤져 친구에게 연락했다.

버스가 큰길에 접어들자 기분 좋은 흔들림에 졸음이 왔다.



소 현 재

아버지가 말한다. "요즘 애들은 나약해서.."

그리고 현재가 말한다. "믹서기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건 나약한 게 아니에요."

.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토로하며 노교수에게 물었다.

"젊은 사람들은 착각을 해요. 노인들이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별거 없어요. 나는 그냥 쉽게 늙었어요 ···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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