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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0. 2017

02. 깨자마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나

2달 전, 10월 29일 일요일, 8:21


한나 마르크스는 잠에서 깨자마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당황스럽게도 지금 남자친구인 지몬 클람은 아니다. 내심 그의 프러포즈를 기대했지만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다. 이제 사귄 지 4년이 넘어가니 슬슬 얘기를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리둥절해진 그녀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 앉아 눈을 비볐다. 지난밤의 이 이상한 꿈은 대체 뭐지? 온몸으로 설레던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침대 옆 거울을 살짝 보니 양 볼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붉은 고수머리는 밤새 베개에 비빈 듯 부스스하게 솟아올랐고,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눈 것처럼 입술까지 빨갛게 반짝거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나는 잠자던 중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낯선 남자와의 에로틱한 꿈은 아니었다. 예전 동료나 이웃 또는 친구들처럼 아는 사람이 등장하는 꿈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꿈속에 남자가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것이 확실한 그 느낌. 따뜻함과 포근함, 설렘과 웃음과 낄낄거림,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대범함, 광기 그리고 물론 행복.

한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몽롱한 꿈을 쫓아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기분 좋은 꿈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라 맑은 머리가 필요했다.

한나는 반년도 넘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리자와 함께 에펜도르프 거리에 있는 낡고 허름한 가게를 수리하고 꾸미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자등록을 하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크라우드펀딩(후원, 기부, 대출, 투자 등을 목적으로 웹이나 모바일 네트워크 등을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를 말한다-옮긴이)을 통해 상당한 금액의 초기사업 자금도 마련했다(부모님들도 조금씩 보태주셨다.) 그 밖에도 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세우고 광고전단을 인쇄하고 리자의 낡은 미니버스에 직접 고안한 로고를 부착하는 등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오늘 2시에 시작한다. 그들의 가게인 ‘꾸러기교실 이벤트-아이들을 위한 여가활동 에이전시’의 문을 여는 오픈 행사를 겸해서 아이들을 위한 성대한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막연하게나마 구상했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10년 넘게 꿈꿔온 일이다. 보육사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나가 리자와 같은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바로 그 날부터.

박봉과 열악한 처우 때문에 한나와 리자는 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나는 어린이집 상황이 늘 안타까웠다. 제대로 된 장난감이나 만들기 재료를 구입하고, 현장학습이나 체육, 미술 수업을 진행하기 위한 재정이 늘 부족했다. 마당의 모래놀이터는 비어있기 일쑤였고 다 썩어가는 그넷줄은 아이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아이들의 부모는 이런 재정적인 어려움을 기꺼이 도와줄 의사를 보였지만, 어째서인지 어린이집 운영진은 재정적 후원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나와 리자는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모른다.

두 사람은 세 번이나 다른 어린이집으로 옮겼지만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 항상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속에서는 직접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 운영진이나 경영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 정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어린이집을 원했다. 자녀들이 정말 즐거워하고 부모들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싶어 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한나는 6개월 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만든 사업구상을 리자에게 보여주고 같이 한번 해보자고 설득했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꾸러기교실’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겨보자고 말이다. 해보지 않으면 이 사업이 성공을 거둘지 말지 알 수 없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하지 ‘않은’일을 후회하기 마련이니까.

한나의 사업구상을 들은 지몬은 단번에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미친 짓이며 헛바람이 나서 벌이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에 친구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한나는 이따금 지몬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사업계획서를 앞에 두고 씨름할 때면 더욱 그랬다. 사업이 실패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리자의 미래까지 위험해진다는 두려움이 퍼뜩 엄습할 때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는 자신뿐 아니라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남자친구도 설득해나갔다. 지금 온 나라가 비록 미디어 위기를 맞아 <함부르크 신문> 편집자였던 지몬도 결국 해고를 당했지만 (사장은 ‘놓아주었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래도 키즈 이벤트 에이전시는 정말 탁월한 아이디어라는 믿음은 변함없었다.

한나와 리자는 퇴사 전 200명이 넘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자녀 보육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아이 걱정 없이 직장에서 일하거나 골프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이런 시설을 얼마나 이용할 용의가 있는지도 꼼꼼히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취합한 결과와 성공적인 크라우드펀딩 덕분에 마침내 지몬조차 깊은 인상을 받고 수긍하게 되었다. 당초 계획의 절반 정도만 성공을 거둬도 보육교사로 받는 얼마 안 되는 월급 정도는 가뿐히 벌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 사업계획 자체는 아주 단순했다. 오후와 이른 저녁시간 그리고 특히 주말에 이런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서 일반 유치원이나 보육시설이 열지 않는 시간에 자녀를 맡겨야 하는 부모들이 주 타깃이다. 아이를 맡기는 비용이 시간당 6유로로 베이비시터 고용보다 저렴해 가격경쟁력도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여주거나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제공할 계획이었다.

꾸러기교실에서는 아주 즐겁고 흥미로운 활동들을 많이 제공할 생각이다. 한 달에 한 번은 토요일에 와서 자고 일요일에 가는 파자마파티도 할 계획이어서 부모들은 오랜만에 아이들을 맡기고 주말을 맘껏 즐기면서 다음날까지 푹 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수요가 많아지면 이런 활동을 점차 늘려갈 것이다.

한나와 리자는 이렇게 야심 찬 계획들을 갖고 있었다. 3~6세 아동을 최대 16명까지 받으면 교사 한 명당 여덟 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예전에 일하던 어린이집에서는 둘이서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재밌는 활동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어드벤처 놀이터로 놀러 가고 닌도르프 공원에 가서 사슴도 보고, 소방서나 경찰서로 견학 가고, 함부르크 도서관을 구경하고, 아이들에게 무료인 엘베 강 변 유람선도 타고, 함부르크 대학병원 인근에 있는 생태놀이터도 가고, 여름이 되면 시내 공원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일들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함부르크에서는 어쩔 수 없는 궂은 날씨를 감안해서 꾸러기교실 공간에 실내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충분히 마련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접수대, 옷걸이, 작은 주방과 기저귀 교환대가 있는 화장실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꾸러기교실의 가장 핵심 공간인 약 40평 방미터에 달하는 놀이 공간이 펼쳐졌다. 리자와 한나는 지난 몇 주 동안 몇 시간씩 머물고 동분서주하면서 이 공간을 그야말로 아이들의 천국으로 변신시켰다.

두꺼운 매트가 깔린 월바(벽에 고정시켜 만든 사다리 모양의 놀이기구-옮긴이), 상점 놀이와 부엌 놀이기구, 미끄럼틀이 달린 기사의 성(이베이에서 헐값에 구입), 이불과 베개가 있는 쉼터, CD플레이어와 그림책, 공주텐트, 역할놀이 옷상자, 승용 완구, 블록과 만들기 재료, 유아용 화장품 등을 준비해 놓았다.

작은 뒤뜰에는 뚜껑을 열고 덮을 수 있는 모래놀이 상자와 신제품 그네(역시 이베이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를 구비했다. 한나의 부모님은 해먹을, 리자의 부모님은 정원용 가구와 모래놀이용 장난감을 후원해주셨다.

한나가 스스로 가장 뿌듯해하는 점은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기 위해 두 달 전부터 기타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자는 ‘미니 디스코’를 담당하기 위해 ‘텍사스에서온카우보이짐’,‘ 베오베오’,‘나에 관한 노래’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맞는 율동을 익혔다.

이처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은 죄다 준비한 두 사람은 꾸러기교실이 성공하리라 믿었다. 아니, 굳게 확신했다.

근무시간이 주로 주말과 저녁이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리자는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3년째 싱글이었다. 키 165센티미터로 많이 크진 않지만, 여성미 넘치는 매력적인 몸매에 짧게 자른 검은 머리는 한 번쯤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따뜻한 호박색 눈동자에, 성형외과 의사들이 인공적으로 똑같이 만드는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살인도 기꺼이 저지를 만큼 탐스럽게 도톰한 입술의 소유자였다.

그런 리자에게 적당한 남자가 한참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꾸러기교실을 위해서는 리자가 온전히 일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나의 경우, 얼마 전만 해도 지몬도 신문사에서 자주 야근했기 때문에 저녁과 주말에 일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 그랬다면 아주 좋았을 테고 둘의 관계에도 플러스였을 테다. 지금은 지몬이 실업자가 된 상태라 얘기가 달라졌지만, 곧 상황이 바뀌기를 바랐다. 지몬도 한나가 사업에 온전히 몰두해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해주었다. 한나는 지몬의 이런 태도를 좋아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좋아하기로 했다. 한나는 모든 상황을 일단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기도 동참해!” 한나가 지몬에게 제안했다. “지금 시간도 많잖아. 그리고 우리 계획대로 잘 굴러가면 어차피 일할 사람도 더 필요하고.”

“내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지몬이 물었다. “아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주는 능력을 완벽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볼까? 아니면 내일 당장 어릿광대 의상을 입고 출동할까?”

“제발 그것만은 참아줘! 애들이 자기를 보고 무서워서 울고불고 소리치며 다 도망칠 거야.” 웃으며 거절한 한나는 머릿속으로 스티븐 킹의 스릴러소설 《잇》에 등장하는 어릿광대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너무하잖아? 난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지몬이 짐짓 서운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시겠지. 특히나 자고 있으면 말이야. 아니면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쳇.” 지몬은 한나를 끌어안았다. “우리 아이가 나오면 내가 얼마나 훌륭한 아빠인지 알게 될 거야!”

“정말이야?” 지몬이 간지럼을 태우는 바람에 낄낄 웃은 한나가 물었다.

사실 그녀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우리 아이.’ 지몬이 진심으로 한 말일까? 지금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결혼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심지어 동거 얘기도 없었다. 지몬은 6개월 전 호헨펠데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한나에게 선심 쓰듯 건네주었을 뿐이다.

“물론.” 지몬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한나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분명히 그럴 거야.”

“그렇다면 기대해야겠네.”

“그리고 꾸러기교실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 도와줄게.” 안타깝게도 지문은 화제를 금방 돌려버렸다. “홍보 관련 일은 내가 기꺼이 맡아서 할게. 그러고는 틈틈이 편집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집중하려고.”

“아니면 이제 마음먹고 베스트셀러를 써보는 건 어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어.”

“왜 없는데?” 한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이 딱 적당한 때 같은데.”

“딱 적당하다고?”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6개월 정도는 월급 전액을 계속 받을 수 있으니까. 위로금까지 더하면 1년 생활비는 충분하잖아? 난 자기가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해!”

“행운아라고?” 지몬은 어이없다는 듯 한나를 쳐다보았다.

“1년 동안 월급은 월급대로 다 받으면서 집에 앉아서 소설을 쓸 수 있잖아?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일이잖아?”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너의 그 무한 긍정주의가 가끔은 짜증 나.” 지몬이 약간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심정이 어떤지 모르잖아.”

한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난 몇 년간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지몬이 까맣게 잊은 것 같아 조금은 서운했다. 얼마 전만 해도 한나의 일이 책임은 엄청 요구하면서도 보수는 적게 주는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했으면서.

언론미디어 업계 상황이 그렇게 나쁘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시점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든든했던 직장을 잃고 게다가 희망까지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나는 모른다. 그녀는 대학 졸업장도 없는 ‘그저’ 보육교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대신 확고하고 무한한 긍정마인드의 소유자다.

그래서 한나는 어떤 문 하나가 닫히면 곧 더 좋은 문이 열릴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지문에 얘기한 적은 없다. 반응이 뻔할 테니까. “달력에나 적힌 유치한 명언들을 내 앞에서는 제발 참아줘”라며 투덜거렸을 것이다.

지몬은 혼자서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나는 가능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거나 혹시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쩌면 어릿광대 의상을 준비해 놓는 것이…….

신문사나 잡지사 또는 온라인 편집국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란 녹록지 않았다. 제아무리 작은 언론사에 이력서를 보내도 몇 주째 거절통보만 날아왔다. 지몬은 상당히 의기소침해졌고 둘의 관계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한나가 의욕과 열정에 사로잡혀 창업을 준비하는 동안 일자리를 못 구해 집에 박혀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지몬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한나는 지몬을 처음 만났던 때가 그리웠다. 지몬은 특유의 유머와 매력과 사랑스러운 태도로 한나의 마음을 녹이곤 했다.

한나와 지몬은 그녀가 일하던 어린이집에서 처음 만났다. 지몬이 그의 대자(代子)를 데리러 왔을 때였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고 그는 갑자기 눈에 띄게 자주 아이를 데리러 오기 시작했다.

우연이었을까 일부러 그랬을까?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두 달 정도 지나자 지몬은 한나에게 일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한나 씨를 더 자주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제가 직접 아이를 낳아서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지몬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완벽한 타이밍은 이미 끝난 후겠지요.” 그의 독창적인 데이트 신청을 떠올린 한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엘베 강 변에서 피크닉으로 보낸 첫 데이트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정말 환상적이었다! 지몬은 아름다운 5월의 햇살처럼 환히 빛났고 두 사람은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강변 모래사장에 캠핑담요를 깔고 앉아 배들을 구경하면서 지몬이 커다란 가방 두 개에 가득 담아온 음식들을 먹었다. 차가운 화이트와인과 샴페인, 주스와 생수, 과일과 치즈, 치아바타, 샐러드, 직접 만든(직-접-만-든!) 프리카델레(독일식 고기완자-옮긴이), 파타 네그라(발톱이 검은 돼지햄-옮긴이), 감바스, 여러 가지 에피타이저 등─지몬은 한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파티 음식을 몽땅 가져왔다. 그뿐 아니라 제대로 된 유리잔, 접시, 커트러리, 천 냅킨까지 모두 준비해왔고 날이 어두워지자 가져온 캠핑용 횃불에 불을 붙였다. 한나는 마치 연회장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모래사장 위에서 펼쳐지는 연회.


그리고 첫 키스…… 수줍고 사랑스러웠으며, 흥분되고 떨렸다. 미친 듯 뛰는 지몬의 심장을 한나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지몬은 신문사에서 일어나는 흥미진진한 일들을 쉼 없이 얘기했다. 언젠가는 하고 싶은 세계 여행에 대해서, 그리고 시간이 나면 꼭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웃음과 호들갑, 재미있는 이야기로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열광과 열정, 열의가 넘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몬의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도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그가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조금 회복되려 할 때 미디어 업계에 위기가 불어 닥쳤다.

편집국 동료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날 때마다 지몬은 점점 더 불안하고 소심하고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그토록 염려하던 해고 한파는 결국 그에게도 들이닥쳤다. 한나는 지몬이 그토록 비탄에 빠져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스스로 자초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지몬은 인생과 운명 그리고 자신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나는 그런 지몬이 한편으로는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한나는 그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확신했다. 지몬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지만, 그녀는 모든 사람의 에너지는 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간다고 믿었다. 낙관론자는 좋은 것을, 비관론자는 나쁜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우주가 그에 걸맞은 결과를 선사하는 것이다.

한나는 지몬이 그렇게까지 비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고 건강하고, 몸을 누일 집도 있고, 먹을 것도 충분하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도 있다. 세상에는 그보다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몬이 빨리 새 직장을 구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길 간절히 바랐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한나는 지몬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쫓아낸 후 벌떡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복도로 뛰어갔다.

“안녕?” 전화를 받자마자 리자의 밝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안녕.” 한나는 하품을 겨우 참으며 인사했다.

“어머, 미안해. 혹시 나 때문에 지금 깼어?”

“무슨 소리! 나야 벌써 몇 시간 전에 일어났지.” 한나가 허풍을 떨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나는 혹시 나 때문에…….”

“아니야, 괜찮아.” 한나가 친구의 말을 끊었다.

“어때? 준비됐어?”

“물론이지! 정말 기대돼 미치겠어!”

“그럼 10시에 꾸러기교실에서 만날까?”

“9시 반에 보자. 나는 거의 다 준비했거든.”

“좋아. 그럼 나도 서둘러서 준비할게. 가는 길에 뭐 더 사갈 것 있어?”

“혹시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빵집에 주문해둔 빵을 찾아오면 좋겠어.” 꾸러기교실로부터 대각선에 위치한 빵집이었다.

“알았어.” 리자가 흔쾌히 말했다. “또 다른 할 일은 없어?”

한나는 잠시 생각했다. “없어. 나머지는 다 준비됐어. 음료수 상자와 풍선에 넣을 헬륨가스와 일회용품들은 지몬의 차에 실려 있어.”

“지몬은 언제 오기로 했는데?”

“11시쯤 온대.”

“알았어.” 리자가 말했다. “그럼 이따 보자.”

“그래, 이따 봐!”

한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조금 전 꿈에서 느꼈던 엄청난 설렘을 다시 느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지난밤 사랑에 빠졌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형편없는 월급으로 혹사당하는 직원이 아니라 ‘꾸러기교실’의 당당한 공동사장인 한나 마르크스라는 사실과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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