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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2. 2017

04. 나중을 위해

<당신의 완벽한 1년>

한나

2달 전, 10월 29일 일요일, 12시 47분

“지금 당장 전화 받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아니면 내가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몰라! 아니면 두 가지 다 할지도 몰라!” 한나가 수화기에 대고 어찌나 크게 소리 질렀던지, 전화연결이 안 되는 상태에서도 호헨펠데에 있는 지몬의 집까지 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러시아 마피아를 보낸다고 전해!” 리자가 뒤에서 소리쳤다. “알바니아 마피아도 같이!”

“들려?” 한나가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리자 정말 화 많이 났어!” 한나는 잠시 말없이 기다렸지만 자동응답기가 돌아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몬 집 전화도, 그의 휴대폰도 침묵했다. 한나의 남자친구는 완전히 연락 두절 상태였다.

한 시간 후면 개업식 첫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인형극을 할 사람도 제시간에 도착해 어슬렁거리고, 페이스페인팅을 위해 고용한 여학생들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입구 바로 옆 주차장에는 에어바운스가 설치되었고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맛있는 빵, 친구들과 한나와 리자의 부모님들이 가져온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와 과자가 가득했다. 로고가 인쇄된 500개의 풍선만이 여전히 봉지 안에 불지 않은 채 들어있었고, 음료수를 놓을 탁자 위에는 수돗물과 리자가 반쯤 마시다 남긴 미지근한 콜라 한 병만 덩그러니 있었다. 1회용 접시와 플라스틱 컵도 없다.

“걱정하지 마. 늦어도 10시 반까지는 도착해서 온 힘을 다해 풍선을 몽땅 불어 놓을 테니까!”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지몬은 이렇게 약속했다. ‘중요한 날’을 앞두고 함께 한나의 집에서 보내지 않고 굳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하던 그의 약속이었다.

“가벼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내일 열심히 일하려면 오늘 보온주머니를 품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어.”


열심히 일해? 물론 그럴 줄 알았다. 마치 땅이 그를 삼켜버린 듯 연락 두절이 되어버릴 줄이야. 혼자만 사라졌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풍선에 주입할 헬륨가스와 식기 그리고 개업식에 사용할 음료수를 전부 지몬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재앙과 같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지몬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몬이 기자증을 소유하고 있으니 메트로에서 도매가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한나는 정말 기뻐했다. “거기서 사는 게 훨씬 싸. 너희가 들고 오려면 너무 무겁기도 하고. 내가 할게. 장보는 비용도 개업식 선물로 쏠게.”

“이제 어떻게 하지?” 리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한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내가 아까 마피아 이야기해서 화났을까? 그냥 한 말인데.”

한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설마 지몬이 네 헛소리 때문에 화가 났는지 여부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리자가 얼른 얼버무렸다. 한나는 그래도 리자가 내심 걱정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리자는 그런 사람이다.

“좋아.” 한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지몬이 지금 어딨는지는 잠깐 접어두고 음료수부터 해결하자.”

“내가 얼른 빵집에 가서 주스하고 물 사 올게.” 리자가 말했다. “어쩌면 플라스틱 컵하고 일회용 접시도 팔지 몰라.”

“거기 얼만지 알아? 카프리썬이 2유로나 한다고!”

“그럼 어떡해?”

잠시 생각에 잠긴 한나는 재빨리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낚아챘다. “내가 지몬집에 가서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보고 올게.”

“그럼 나 혼자 여기서 어떡하라고?”

“풍선 좀 불고 있어. 서두르면 오십 개 정도는 불 수 있을 거야!”

15분 후 한나의 낡은 트윙고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몬의 집 앞에 멈춰 섰다. 황급히 뛰쳐나가려다가 긴 머플러가 핸들에 걸려 하마터면 목이 졸릴 뻔했다.

“진정하자, 한나.” 머플러를 풀며 한나는 중얼거렸다. 10초 후 마침내 머플러를 풀고선 차분히 차문을 닫고 지몬의 빨간 벽돌집으로 달려갔다.

한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또 한 번, 두 번, 길고 세게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고 초인종을 내리눌러도 기척이 없었다. 집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몸이 안 좋아서 보온주머니를 껴안고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고 했는데?


아니면─불현듯 이상한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감기에 걸린 것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었던 걸까? 혹시 뜨거운 물을 채운 보온주머니가 아닌 다른 따뜻한 무엇을 껴안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걸까?

아니야.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지몬은 그런 남자가 아니다. 그렇게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지몬이 한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까지 몇 주나 걸렸다. 행동이 민첩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즉흥적인 만남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면?’이라고 속삭이는 작고 악랄한 목소리가 한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지몬의 실직 말고 두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한나가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는 이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지몬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다.

한나는 일곱 번째 초인종을 눌렀다. 이제 예의는 지킬 만큼 지켰으니 남자친구가 어쩌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열쇠를 사용하기로 했다. 한나의 마음은 걱정과 분노가 뒤섞였다. 지몬이 집전화도 안 받고 휴대폰도 안 받고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정말 집에 없든지 밤새 귀머거리가 되었든지 아니면 죽은 것이다.



요나단
1월 1일 월요일 9시 20분

요나단은 아침을 먹은 후 편안한 가죽 안락의자에 앉았다. 서재의 커다란 돌출창문으로 이노센티아 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 겨울 풍경을 만끽했다.

하지만 오늘은 지난밤 송년회를 즐긴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가로막았다. 그의 집 앞과 이웃집 앞에도 폐지 수거함과 재활용 수거함에서 쓰레기가 흘러넘쳐 보기 거북했다. 이 구역의 폐지와 재활용 쓰레기는 격주 월요일에만 수거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전 월요일에 쓰레기를 수거했고 그 이후로는 환경미화원들이 모두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앉아 캐럴이라도 부르는 모양이다. 물론 누구나 크리스마스를 즐길 권리가 있고 휴식을 취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요나단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노트북을 열었다. 함부르크 시 청소담당과 홈페이지에 접속한 그는 민원 버튼을 누른 후 글을 작성했다.

친애하는 담당자님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우리 아름다운 도시의 폐지와 재활용쓰레기 수거 상태에 미흡한 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현재 집집마다 쓰레기 수거함이 흘러넘쳐서 아름다운 함부르크시의 미관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연휴 기간 때문에 쓰레기가 많이 쌓여 수거가 어려운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긴급대책을 마련하여 세금을 내는 시민이나 시청 직원 그리고 환경미화원 모두가 수긍할 만한 방법을 모색하면 좋겠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요나단 N. 그리프
(문 앞에 쓰레기통이 흘러넘치는 이노센티아 거리에 거주 중)

그는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본 후 전송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했어. 문제 해결은 문제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지. 일을 엄중하고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을 만큼 뿌듯했다.

그는 다시 안락의자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이번에는 서체나 내용보다는 다이어리의 주인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는 데 집중했다.

허사였다. 3월 16일이 생일이라는 것 말고는 단서가 없었다. 이따금 장소들이 나오긴 했다. 예를 들어 1월 2일에(저녁 7시, 도로테엔 거리 20번지. 아래서 두 번째 초인종) 약속 장소가 적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내일 저녁 7시에 도로테엔 거리에 누군가 다이어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진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별 도움이 안 되는 정보다. 그런데 왜 이름 대신 ‘아래서 두 번째 초인종’이라고 적었을까? 이름이 없으니 구글 검색도 불가능했다. 웬 신비주의? 이래서는 다이어리 주인을 찾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적혀 있는 주소로 찾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연휴에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가는 것은 큰 실례가 아닌가.

문득 맨 뒷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개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 등을 적는 페이지니까. 그럼 다이어리 주인과 연락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역시 빗나갔다. 12월 31일 뒤에 있는 ‘메모’란은 비어 있었고 곧바로 뒤표지였다. 하지만 요나단은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뒤표지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그 안에 작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종이를 잡아당기자 ‘나중을 위해 보관하기!’라고 적힌 봉투가 나왔다. 점점 흥미진진한데?

밀봉되지 않은 봉투를 열어본 요나단은 휘파람을 불었다. 가방을 두고 오지 않길 잘했어! 그는 재빨리 봉투에 들어있는 돈을 세어보았다. 50유로, 20유로 그리고 10유로짜리 지폐들을 합쳐보니 전부 500유로였다.


요나단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누군가 새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스케줄을 적어놓은 다이어리를 알스터 호숫가에서 잃어버렸거나 버렸거나 아니면 일부러 요나단의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아 놓았다. 거기엔 500유로가 든 돈 봉투가 들어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번호나 주소도 없고 주인을 찾을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었다.

이제 이 다이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이것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유실물센터! 그래, 가방과 다이어리를 유실물센터에 갖다 주면 되겠다.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니까. 누군가는 물건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그 물건을 습득해 유실물센터에 맡기면 물건 주인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갈 수 있겠지! 요나단은 유실물센터 주소와 운영시간을 알아보려다 멈칫했다.

그게 최선일까? 이 다이어리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물건 같다. 거기에 상당한 금액의 돈까지 들어있다! 500유로는 결코 푼돈이라고 할 수 없다. 유실물센터의 직원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잘 보관할까? 아니면 돈만 슬쩍 챙기고 다이어리는 아무 데나 처박아놓아 다른 유실물들과 함께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영원히 잊히는 건 아닐까? 센터 직원들의 월급은 얼마일까? 많지는 않을 테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돈의 등장은 분명 큰 유혹일 것이다. 그러니 유실물센터에 가져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어쨌든 가방은 그의 소유인 자전거에 걸려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이어리를 주인에게 안전하게 돌려줄 책임이 있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요나단은 다시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함부르크 신문
편집팀/ 독자 서비스
담당자 귀하
1월 1일 함부르크

친애하는 편집국 팀원 여러분

이번에는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 이메일을 보냅니다. 오늘 아침 알스터 호수 주변에서 운동하다가 가방에 든 다이어리를 습득했습니다. 악용의 우려가 있어 더 자세한 언급은 생략합니다.

혹시 다이어리 주인이 귀사에 신고를 할 경우 다이어리와 가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받아놓으셨다가 저에게 전달해주시면 제가 편집국을 통해 다이어리를 전달하겠습니다.

다이어리 주인을 찾는 기사를 다음 신문에 실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늘 그렇듯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요나단 N. 그리프
추신: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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