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Jan 17. 2017

05.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당신의 완벽한 1년>

한나

2개월 전, 10월 29일 일요일, 13시 24분

지몬은 다행히 죽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불을 겹겹이 뒤집고 쓰고 누워 창백하고 코감기에 걸린 얼굴만 겨우 보였다. 주위에는 코 푼 휴지들이 밥맛 떨어지게 수북이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 옆 탁자 위에는 기침 시럽과 목감기약, 체온계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놀란 한나가 소리쳤다.

게슴츠레 눈을 뜬 지몬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한나?”그는 심하게 색색거리며 힘겹게 몸을 조금 일으켰다. “무슨 일로 왔어?”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조금 전만 해도 연인의 초췌한 몰골에 놀란 한나의 걱정은 순식간에 분노로 변했다. 지몬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함과 동시에 분노한 그녀는 이불을 홱 걷었다. 스웨트셔츠와 스키 탈 때 입는 내복 차림의 몸이 드러났다.

“왜 이래!” 놀란 지몬이 양팔로 몸을 감싸며 항의했다.

“대체 뭐하자는 거야!” 한나의 목소리 역시 떨렸지만 분노의 떨림이었다. “내가 지금 왜 왔는지 정말 몰라? 조금 있으면 개업식인 거 잊었어?”

안 그래도 창백한 지몬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개업식? 아, 안 돼!” 그는 베개 위로 털썩 엎드렸다.

“하지만 사실이야!”

“정말 미안해!” 지몬은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켜 머리를 쥐어뜯었다. “잠깐 눈만 좀 붙이려고 했는데 자 버렸어. 내가…… 내가…….”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한나를 쳐다보며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정말…… 정말 미안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여전히 화가 났지만, 흥분은 한결 가라앉았다. 지몬의 꼴이 너무 처참해 보였다. 셔츠와 바지가 몸에 딱 달라붙을 만큼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침대 곁에 앉았다.

“30분 후면 개업식인데 11시부터 자기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어.” 비난하려고 한 말인데 오히려 슬프고 실망스럽게 들렸다. 이렇게 아픈 사람한테 뭐라 할 수 있겠는가.

“30분 후?” 지몬은 일어나려 했지만 한나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냥 누워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야.”

“몸이 정말 안 좋기는 해.” 그는 한숨을 쉬고 신음을 내며 다시 누웠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열도나.”

“열이 얼마야?” 한나는 탁자 위 체온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에 38.2도였어.”

“그 정도면 다행이네.” 한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 애썼다. “그 정도면 아직 견딜만하겠네. 당장 응급헬리콥터는 안 불러도 되겠어.”

“하지만 계속 땀이 난다고.” 희미한 항변처럼 들렸다.

“거위 털 이불을 세 겹이나 덮고 있으면 나 같아도 땀이 나겠다.”

“목도 완전히 퉁퉁 부었어. 봐.” 그는 양손으로 턱 아래를 감쌌다.

한나는 몸을 숙여 지몬의 목을 만져보았다. 정말 많이 부었다. “정말이네.” 한나가 걱정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많이 아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아. 하지만 목캔디 열 개 정도는 먹은 것 같아.”


“그렇게 힘들었어?”

“더 심해질까 봐 예방 차원에서.”

“그렇구나.” 증세가 별로 심하지도 않은데 약을 많이 먹는 것은 지몬만 그런 건지 다른 남자들도 그러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목캔디니 많이 먹어도 특별한 부작용은 없을 것이다. 특별한 약효도 없을 테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몸이 축축 처져.” 지몬은 계속 엄살을 부렸다. “온몸이다 아프고 어지러워. 조금 전에 화장실도 겨우 갔다 왔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기도 힘들어.”

“그럼 그냥 누워서 계속 푹 자는 게 좋겠어.”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를 더 들어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문의 라디오 시계는 1시 반을 가리켰다. “자기 자동차 열쇠를 주면 짐을 내 차에 옮겨 실을게.”

“아니, 기다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행동은 조금 전보다 느렸다. “10분만 시간을 줘. 같이 갈게.”

“지몬.” 한나는 걱정과 단호함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단 10분이나 기다려줄 만큼 여유가 없어. 그리고 지금 자기 상태로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서 있기도 힘들댔잖아. 그러니까 그냥 쉬는 게 좋겠어.”

“그래도 되겠어?” 그의 상체는 다시 슬로모션으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당연하지. 이제 그만 갈게.”

“그냥 내 차 타고 가. 그러면 짐을 옮겨 싣지 않아도 되잖아!”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한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몬의 오래된 포드 머스탱은 그가 평소 신성시하는 물건이다.

“당연하지.”

그는 한나에게 그의 신성한 자동차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가 차 운전을 한나에게 맡긴 경우는 딱 한 번이었다. 약 6개월 전, 35세 생일을 맞은 그가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레퍼반에 있는 ‘한스 알베르스 엑’의 모든 술을 다 비워버리려고 작정했을 때였다. 물론 실패했지만.

지몬이 한나에게 전화해 머스탱을 절대 유흥가에 세워두고 갈 수 없으니 제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맥주 반 잔만 더 마시면 술집에 있는 술을 다 비우겠다는 목표의 성공을 목전에 둔 듯한 목소리였다.

새벽 4시 반이었고, 함께 있다가 두 시간 전에 먼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나는 상당히 짜증 났다. 그래도 택시를 타고 레퍼반으로 달려가 만취한 연인과 그의 친구들을 지몬의 머스탱에 태워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음날 셋은 심한 두통을 동반한 숙취에 시달렸고 한나는 쌤통이라 여기면서도 점심 무렵 빵과 오렌지주스 3리터를 사 들고 찾아갔다. 그러면서 내년 자신의 30번째 생일에 똑같이 되갚아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이 화나진 않았다. 지몬이 그렇게 마음 놓고 즐기는 모습을 최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시작되어 편집국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지나치게 신중해졌고 예전과 비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다섯 번은 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 진짜 실직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몸이 정말 안 좋은 모양이네.” 한나가 말했다.

“많이 안 좋아.” 그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른 내 차 갖고 가.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말리기 전에.”

“알았어. 끝나고 전화할게.” 한나가 서둘러 말했다.

“그냥 내가 전화할게. 몸이 빨리 회복될 수 있게 아침까지 쭉 잘지도 모르겠어.”


잠깐 한나의 마음에 다시 불신이 싹트려 했다. 왜 전화하는 것을 만류하지? 뭔가 감출 것이 있어서 방해받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멍청한 생각이다. 지몬의 창백한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가 푹 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한나는 누운 지몬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는 곧바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20분밖에 안 남았다. 이제 지몬이 그토록 아끼는 애마가 능력을 보여줄 때다!

요나단 N. 그리프 귀하
1월 2일 함부르크

친애하는 그리프 씨

귀하의 새해 인사에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희 신문사는 애정을 가지고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는 애독자들에게 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바쁘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타나 실수를 늘 지적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지적하신 오류도 바로 교열편집국에 전달했습니다.

가방과 다이어리 습득 문제와 관련해서는 안타깝지만, 저의 신문에 실어드릴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귀하께서 저희 신문사에 습득 광고를 내시는 것은 가능합니다. 광고부서 및 광고비용은 본 메일에 첨부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방과 다이어리를 관할 유실물센터에 맡기는 것을 추천합니다. 인터넷으로 관할 센터를 쉽게 찾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군다 프로브스트
함부르크 뉴스 독자서비스
함부르크 시민이 함부르크 시민을 위해 만든 신문!

요나단
1월 2일 화요일 11시 27분

역시 그렇군. 이런 ‘사소한 것’을 실어줄 공간이 함부르크 신문에는 없단 말이지? 요나단은 네 번째 줄 잘못된 위치에 자리한 쉼표를 노려보았다. 독자서비스 담당자 군다 프로브스트라는 여자한테 이런 기사도 실어주지 않는다면 ‘함부르크 시민이 함부르크 시민을 위해 만든 신문!’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요나단은 메일 창을 닫았다. 유실물센터에 보내라고? 날 얼마나 멍청이로 생각하는 거지?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봐? 노트북을 닫은 그는 책상 옆에 놓여있는 다이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펼쳐보았다.

익숙한 글씨체. 니콜리노.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괴이한.

그는 얼른 다이어리를 덮었다. 말도 안 돼. 어머니가 뭣 하러 다이어리가 든 가방을 그의 자전거에 매달아 놓았겠는가? 수년간 일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만약 그렇다면 어머니가 함부르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지켜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는 말이다.

아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요나단 N. 그리프는 책상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쿠스 보데와 12시에 미팅이 있다.

아침부터 보데의 비서가 전화해서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무슨 일이 그렇게 긴박한 걸까. 4주 전 출판사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얼굴을 내비쳤는데 그사이에 그리고 연휴 동안 무슨 큰일이 일어났을까?

요나단은 늘 그렇듯 정각에 맞춰 엘베 강가에 자리 잡은 하얀색 그륀더차이트 양식의 대저택에 들어섰다. 이 저택은 몇 세대에 걸쳐 그리프 가문의 소유였고 현재는 약 7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그리프손&북스의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그의 고조부 에르네스트 그리프가 약 150년 전에 출판사를 세웠다. 요나단은 파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갈 때면 늘 경외심, 자부심 그리고 불편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맨 위 층계참에는 전임자들의 유화 초상화가 쭉 걸려있다. 에르네스트 그리프, 증조부 하인리히, 조모 에밀리에 (분만실에서 남자아이인 ‘에밀’을 기대했는데 마지막에 성별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버지 볼프강의 초상화가 걸린 벽을 바라볼 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최고조에 달해서 자기 사무실로 가는 왼쪽 유리문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 버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프 대표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고무나무의 먼지를 닦고 있던 비서 레나테 크루크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행주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면서 왼손으로는 안경을 치켜 올리고 진갈색 원피스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졌다.

새하얀 머리를 언제나 단정하게 올려 묶은 레나테 크루크는 예순이 넘어도 미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크루크여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나단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보데 사장 들어오라고 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비서는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레나테 크루크는 아버지 때부터 비서로 일했다. 이후 요나단 아래서도 계속 비서로 일하지만, 너무 할 일이 없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금요일 점심 무렵에 퇴근하고 월요일은 휴무, 주당 28시간 근무시간 중에서 실제로 근무하는 시간은 기껏해야 15시간 정도였다.

은퇴를 앞둔 그녀가 마지막까지 직장인으로, 그러니까… 그러니까… 고무나무에 앉은 먼지를 닦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엘베 강변의 환상적인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요나단도 보데를 기다리며 커다란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때마침 커다란 컨테이너선이 지나갔다. 갈매기 몇 마리가 배를 따라 강의 어귀로 날아갔다. 어디로 가는 배일까? 아래 강변 쪽에 백조 한 쌍이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백조가 아니라 흰색 비닐봉지였다. 요나단은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려 책상 옆 회의용 탁자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크, 노크!” 팔에 서류가방을 낀 마르쿠스 보데가 문틀에 대고 노크를 했다.

요나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발짝 다가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악수하며 보데가 새해 인사를 건넸다.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보데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30대 후반인 그는 항상 말쑥했고 어떨 때는 지나치게 말끔할 정도였다. 항상 잘 맞는 양복을 입고 금발 머리는 정성껏 가르마가 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흘 정도 깎지 않은 수염과 눈 밑의 다크서클, 살짝 구겨진 셔츠차림이었다. 컨디션이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고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문제가 좀 있습니다!” 보데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엇입니까?”

보데는 가방을 열어 서류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연휴 동안 이번 분기 잠정매출을 계산해 다음 분기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봤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보데은 어리둥절해서 요나단을 쳐다보았다. “네?”

“연휴에 회사 일을 생각하다뇨. 연휴는 쉬라고 있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야죠.” 보데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두 자녀가 있었다.

“아, 네.” 마르쿠스보다는 더 당혹스러워했다. “그래도 저는 명색이 그리프손&북스의 사장입니다. 당연히 일반 직원처럼 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건강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장이라도 쉴 때는 쉬어야죠.”

“지난 분기 매출액이 예상보다 30%나 감소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마냥 쉴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는 헛기침을 하고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떠나버린 마당에 반드시 휴일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요나단이 당황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안됐네요.” 요나단이 느끼기에도 끔찍하게 어색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보데와는 관계가 좋은 편이었지만 업무적 관계라 사적인 이야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됐습니다.” 보데는 몸을 조금 더 움츠렸다.

“우리……”요나단은 말을 하다말고 뭐라 해야 할지 생각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티나와 헤어지기로 했다고 알렸을 때 친구들은 뭐라고 했던가?

아무 얘기도 없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이혼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혼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나갔으니까.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어차피 없었다. 토마스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이혼 문제에 있어서 토마스는 위로자의 자격 박탈이다.

이혼한 후에야 지인 몇 명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의 주 관심사는 둘의 재산 분할 문제였고 그건 아무 문제 없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마르쿠스 보데는 그를 계속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나단이 하려던 말을 마저 끝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요나단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맥주나 한잔하러 갈까요?”

“맥주요?”

“그래요. 맥주 한잔하러 가요!” 가끔 레드와인 한 잔 정도 외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요나단이지만 이 제안이 적절한 것 같았다. 여자에게 차인 남자들은 보통 맥주를 마시러 가지 않나?

“지금 낮 12시인데요!”

“아, 그렇죠?” 요나단이 멋쩍게 말했다. 생각만큼 좋은 제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출실적에 관해 얘기를 나눠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보데는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갑자기 더는 초췌해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요나단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들 간의 대화보다는 차라리 이게 더 낫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예상 매출목표에서 30% 미달입니다.” 보데는 탁자 위의 서류를 톡톡 쳤다. “상당히 심각합니다.”


“혹시 부진한 이유도 분석했습니까?”

“일부는요.” 마르쿠스 보데가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출판업계가 전반적으로 매출 하락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우리 회사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작가 후베르투스 크룰의 작품 판매량이 서서히 감소하고 있는데 현재 투병 중이라 당분간 신작을 내놓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더 이상 구간들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고 크룰의 신간이 나오지 않는 한 기존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끌어모으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요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룰은 그의 할머니가 출판사 대표 시절 발굴한 작가였다. 할머니는 크룰이 독일 전후문학을 이끌 기대주라고 여겼고 결국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몇 작품은 매출목표에서 크게 벗어났습니다.”

“그렇군요. 어떤 작품들입니까?” 점점 심각해졌다.

“예를 들면.” 보데는 서류뭉치를 들어 쭉 넘겨보다가 한 장을 끄집어냈다. “이 작품입니다.” 그는 요나단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요나단은 종이를 들여다보고 의아해했다.“ 《은하수의 고독》? 이건 작년 독일도서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잖아요!”

“그렇죠.” 보데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희가 너무 비싸게 계약한 데다가 후보에 오른 이후 증쇄

한 3만 부 중 2만 7천 부가 재고로 쌓여 있어요. 그리고 이젠 서점에서 반품까지 들어오는 실정입니다.”

“흐음. 이유가 뭡니까?”

“아마도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지 않아서겠죠.”

“하지만 정말 훌륭한 소설이잖습니까!” 요나단은 판권 계약 전 원고를 읽었고 성공을 거두리라 확신했다. 《은하수의 고독》은 예술의 모든 요소를 두루 담은 훌륭한 문학 작품이었다.

“대표님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더 에로틱한 것들을 원하고 존 그리샴의 소설들을 좋아하죠.”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라를 생각하면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그렇군요. 좋은 방안이 있을까요?”

“제가 대표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에게요?”

“출판사 대표시잖아요.”

“그렇지만 보데 사장이 전문가이지 않습니까?” 요나단이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보데는 당황과 뿌듯함이 섞인 헛기침을 했다. “그렇습니다만 제가 단독으로 그리프손&북스가 나아가야 할 노선을 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워워.” 요나단이 진정시키듯 말했다. “제비가 온다고 아직 여름이 아닌 것처럼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곧바로

몰락하진 않아요. 벌써 ‘새로운 노선’을 얘기하는 것은 성급합니다.”

“유감스럽지만 ‘한 번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는 요나단 앞으로 또 다른 서류들을 내밀었다. “우리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해당되는 일입니다. 한참 전부터 그랬는데 이제까지는 업계 특성상 있는 등락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는 크룰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전략 마련이 시급합니다.”

“흐음.” 요나단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보데 사장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포트폴리오를 전부 뒤엎자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을 제대로 대표님께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요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까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각자 생각에 빠졌다. 요나단은 알스터 호수에서 만난, 해리 포터를 닮은 젊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어떤 책을 즐겨 읽을까? 그 남자한테 물어볼 걸 그랬군!

“그럼 저는 이만…….”보데가 침묵을 깼다. “서류는 대표님이 검토하시도록 두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요나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요나단은 또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그는 보데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보데가 말했다. “아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요나단은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에서 나가는 보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농담이로군!

매거진의 이전글 08. 까마귀 밤에 우니 _이백(李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