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완벽한 1년>
한나
두 달 전, 10월 30일 월요일, 16:53
내 작은 앵무새-앵무새!
하루 종일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지-소리를 지르지!
CD플레이에서 큰 소리로 울려 퍼지던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지몬은 양팔을 하늘로 올려 그대로 멈췄고 낄낄거리며 소리를 지르던 아홉 명의 아이들도 똑같이 따라 했다.
한나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남자친구가 어릿광대로 분장한 모습은 제법 어울렸다. 알록달록한 의상은 너무 커서 헐렁거렸고, 땀범벅이 된 얼굴 부분 부분은 화장이 지워져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몬은 벌써 20분째 박수무당처럼 놀이방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아이들과 함께 ‘그대로 멈춰라.’ 게임을 즐기며 놀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오기만 하면 지몬의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라는 한나의 예상이 맞았다.
게임 자체는 간단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음악이 멈추면 그대로 멈추는 게임이다. 움직이거나 넘어지는 아이들은 탈락이다. 탈락자들은 리자와 함께 주방에서 팝콘을 만들고 바늘과 실로 팝콘을 엮어 목걸이를 만들며 놀기 때문에 탈락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동보육 실습에서 배운 중요한 내용이다. 절대 아이들을 패자로 만들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아이들의 눈물과 분노발작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신나게 춤추던 아이들은 비록 놀이에서 탈락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리자와 주방에서 놀았다. 팝콘을 만들고 싶어 일부러 넘어져 탈락하는 애들도 있었다.
놀이방 천장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흰색 팝콘 장식줄이 여러 개 걸렸다. 팝콘 절반 정도가 아이들의 통통한 뱃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장식줄은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한나는 다시 활기차게 ‘재생’ 버튼을 눌렀고 앵무새 노래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으며 지몬은 노래에 맞춰 왕년의 에어로빅 스타 같은 기이한 동작들을 선보였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바로 뒷벽에 팝콘 장식줄을 매달 던 리자가 한나에게 속삭였다. “지몬 이제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한창 물이 올랐어. 아이들도 다 재밌어서 죽으려 하잖아.”
“죽으려 하는 게 애들은 아닌 거 같은데.” 리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몬을 쳐다봤다. “지몬은 곧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보여. 땀으로 흠뻑 젖었잖아. 광대화장으로 가려져서 그렇지 지우면 얼굴이 시뻘게져 있을 거야. 잘 놀고 있는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땀을 많이 흘리면 감기가 싹 달아날 거야.” 한나가 받아쳤다.
“어제의 복수야?” 리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복수라니 무슨 말이야?” 한나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지몬이 우리를 못 도와줘서 지금도 배로 열심히 하고 있는 것뿐이야. 공평한 일이잖아. 아이들과 이 놀이를 하겠다는 것도 지몬의 생각이었어.”
“어제 일로 너에게 죄책감을 느껴서 그랬겠지.”
“그런 죄책감은 춤과 함께 날려버리면 되지.” 한나가 웃으며 말했다. “다 발산해버리는 거야. 그동안 쌓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말이야.”
리자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대충 ‘잔인한 여자친구’로 들렸다.
한나는 다시 힘차게 CD플레이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지몬과 아이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춤을 멈췄다. 핀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만 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더니 곧 주방으로 재빠르게 기어갔다. 지몬을 자세히 보니 리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안색이 매우 나빴다. 한 번만 더 하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마지막으로 음악을 틀었다. 몇 분 후에는 지몬에게 자유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5시가 다 된 터라 30분 정도 팝콘 장식줄을 만들어 장식한 후 정리를 하고 청소를 시작하면 아이들을 데리러 부모들이 올 것이다.
오늘 오후 활동도 매우 성공적이라 한나는 뿌듯했다. 아이들은 정말 즐겁게 지냈고 모든 놀이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싸우거나 우는 애도 없었고 엄마한테 가겠다고 투정부리는 아이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사고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몬 덕분에 오늘은 16명이 아닌 24명을 받아 돌볼 수 있었다. 접수를 받을 때 아무도 돌려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특히 개업 초기에 찾아온 고객들을 실망시켜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입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 한 명당 4시간인데 1시간당 6유로를 받으니… 24곱하기 24인데… 그걸 두 명 아니, 세 명으로 나누면… 세금도 떼면…….
“아아악!”오늘 수입을 계산하던 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모두 한 방향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자연히 그쪽을 쳐다본 그녀의 눈에 지몬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장면이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움직임 없이 누운 어릿광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찢어지는 괴성이 퍼졌다. 그녀 안에서 솟구쳐 나오는 소리였다.
“지이이이몬!”
요나단
1월 2일 화요일, 16:04
요나단은 30분 동안 아버지와 다시 얘기를 나눠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혼란과 좌절이 동시에 밀려왔다. 자동차 시동조차 제대로 켤 수 없을 만큼 멍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치매 때문에 오래전부터 자기만의 세상에 머무는 건 알았지만,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말은 큰 충격이었다. 어쨌거나 어머니와 관련된 말이니까!
요양원에서 나오기 전 요나단은 혹시나 하여 담당의사와 간호사에게 문의했지만 역시나 소피아 그리프라는 사람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 처녀 시절 이름인 소피아 몬티첼로 역시 방문한 적이 없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온다면 직원들이 모를 수 없다. 존넨 호프 요양원은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기차역’도 아니고 ‘최고의 요양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담당의사 크네제벡 박사는 최고의 요양원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요나단에게 이 말은 매달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청구서에 대한 해명처럼 들렸다.
그런데도 일말의 의심, 실오라기 같은 불안이 남아 있었다.
제아무리 최신식 시설을 갖춘 최고급 요양원이어도 철옹성은 아니다. 요나단도 몇 번이나 특별한 절차 없이 그냥 들어왔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인적 없는 사무실 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금 전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했던 아버지의 말이 치매로 인한 헛소리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다이어리까지 그의 수중에 있다. 요나단의 책상 위에 있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후 더 미스터리하게 느껴지는 그 다이어리.
과연 그럴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럴 리 없다. 설령 어머니가 30년간의 연락 두절 상태를 끝내고 아들 앞에 나타나기로 결심했다면 얼마든지 덜 복잡한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냥 전화를 하면 된다. 아니면 편지를 보내거나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니는 그중에서 아버지를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요나단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무리 얼토당토않더라도 이 일을 정확하게 파헤치지 않으면 절대 평온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요나단은 자동차 컴퓨터화면에 있는 녹색 전화버튼을 눌러 음성인식으로 레나테 크루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요양원을 찾는지 여부를 가장 잘 알 사람은 아버지의 곁을 가장 오래 지켰던 비서일 테니.
“안녕하세요, 대표님.” 레나테 크루크가 친절하고 업무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크루크 여사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말입니다…”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방금 아버지를 뵙고 왔는데요…….”
“괜찮으신가요?” 비서가 깜짝 놀랐다.
“네? 아, 네네. 잘 계세요.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요.”
“물어볼 게 있다고요?” 비서가 되물었다. “말씀하세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혹시 최근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났는지 아세요?”
레나테 크루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네.” 비서가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잘 이해 못 한 것 같아요. 대표님 어머니 말씀이신가요?”
“네. 저희 어머니 소피아 그리프 말입니다. 또는 몬티첼로.”
“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아버지가 오늘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 요나단” 레나테가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가 열여덟 살이 된 이후에는. 그런데 지금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지금 아버님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잖아요.”
“물론 알고 있어요.” 재빨리 대답한 그는 레나테에게 질문한 자신 이 바보 같았다. “그저 확실하게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 그러니까 그 말씀을 하실 때 아버지의 정신이 아주 또렷해 보였거든요.”
“네. 바로 그 점이 치매라는 병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죠.” 레나테 크루크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사자는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현실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제 어머니가 함부르크에 오셨는지 여부는 모르시겠군요?”
“어머니가 오지 않으신 건 확실해요.”
“혹시……”이미 바보 같은 질문을 시작했으니 더 이상해 보일 것도 없다. “혹시 지난 몇 년간 제 어머니를 보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나요?”
“아뇨.” 레나테 크루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아세요?”
“제가 알기로는 피렌체 근교예요. 이탈리아.”
“저도 그건 알아요. 정확한 지금 주소를 아시나 해서요.”
“예전 주소 말고는 모릅니다. 예전 주소로 연락은 해보셨나요?”
“아니오.” 요나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그럴 이유가 없었어요.”
“지금은 이유가 생겼다는 말인가요?”
“사실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아버지의 말이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종종 오신다고 해서…….”
“혹시 그 말 때문이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100% 확신해드릴 수 있어요.” 레나테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전임 회장님이 거기 계시는 걸 어머니가 어떻게 알겠어요? 어쨌든 어머니가 저한테 연락해서 물어본 적은 없어요. 설마 대표님한테 물어보셨나요?”
“아니에요.” 요나단이 대답했다. 이미 수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고 마음속으로 덧붙이면서.
“그것 보세요.” 레나테 크루크가 말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찾아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으음,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그녀는 주저하며 물었다. “제가도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없어요.” 그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불현듯 소리쳤다. “아, 한 가지 있어요!”
“뭔가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용서해주셨다고 하던데요. 혹시 무슨 뜻인지 아세요?”
“전혀 모르겠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혹시 두 분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시나요?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이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머니는 이곳 북쪽나라에서 행복하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전임 회장님처럼 일을 많이 하는 남편과의 삶은 그분이 생각했던 삶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 오신 분이라 가치관이 달랐겠죠. 어머니께서 전임 회장님을 용서하셨다는 말은 아마도 이걸 두고 한 말 같아요. 남편이 자신에게 소홀하다고 느꼈겠죠.”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까?”
레나테 크루크는 웃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대표님 어머니는 제 상사의 부인이셨죠. 전임 회장님이 그렇게 말했고 제가 그 말에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어 보였어요.”
‘그 말에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말에 의문을 가질 여지는 아주 많아졌다.
“그렇군요.” 요나단이 말했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 것 같네요.” “그렇지만 너무 혼란스러워요. 아버지는 그동안 한 번도 어머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어머니를 자주 뵙는다고 하는 말이 이상하지 않아요? 너무 이상해요!”
“그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레나테 크루크가 말했다. “치매 환자들은 현재보다는 과거에 살고 있어요. 그건 지극히 흔한 경우에요.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보다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훨씬 더 생생하게 느끼죠.”
“저도 알아요.” 그는 비서에게도 기이한 다이어리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했다가 말았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도 그 정도로 친하진 않았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럼 이만. 아, 크루크 여사님?”
“네?”
“새해 꽃다발은 조만간 드리겠습니다. 챙긴다는 것을 깜빡했어요.”
레나테 크루크는 조용히 웃었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 카네이션 선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올해는 꽃 선물로 제 사무실을 어지럽히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한테는 그런 말을 안 하셨어요?”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표님은 여자를 좀 더 알아야겠네요.”
“무슨 말입니까?”
“언젠가는 이해하실 거예요.”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혼자 된 그는 사브에 앉아 핸들을 초초하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착각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여자를 더 알아야 한다는 건 또 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