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우리 인생에 우연이란 없어요.

<당신의 완벽한 1년>

by 더굿북

요나단

1월 2일 화요일, 18:56

문득 가수 셰어가 떠올랐다. 여자는 셰어만큼 아름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셰어만큼 성형수술을 한 것 같진 않았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지만 10년 정도 더 어릴 수도 있겠다. 아니면 더 많거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윤기 나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았고, 뚜렷한 윤곽은 인디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가 입고 있는 타이트한 차콜색 바지는 짙은 회색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엄청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작가라면 아마도 시간을 초월한 우아함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요나단은 여자에게 몇 걸음 더 다가가 손을 내밀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슐츠 씨. 제 이름
은…….”

“쉿!” 여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제는 왠지 신비스럽게 보였다. “이름을 말하지 마세요!”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여자는 문을 안쪽으로 활짝 열고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아, 네.” 요나단은 발매트에 신발을 털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더듬거렸다. “슐츠씨, 저는 그러니까…….”

“사라스바티.” 여자는 또 그의 말을 끊었다.

“사라스밧?”

“제 이름은 사라스바티입니다.”

“네? 사라스바티 슐츠라고요?

여자는 경쾌하게 웃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사라스바티는 저의 영적인 이름이에요. 영혼의 이름이죠.”

“영적이라고요? 아, 예.” 요나단은 지금 당장 인사하고 다시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매우 아름답지만 상당히 이상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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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알스터 호수에서 봤던 해리 포터를 닮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 역시 영혼 어쩌고 중얼거렸지. 혹시 함부르크 식수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니라면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물론 요나단은 나가버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호기심이 너무 컸다. 그리고 일종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사라스바티는 지혜와 학식을 상징하는 인도의 여신이에요.” 슐츠 부인은 요나단을 거실로 안내하면서 설명했다. 밝고 모던한 가구와 짙은 색 목재의 앤티크 가구가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금은사세공이 들어간 스탠드형 괘종시계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세 개의 창문에는 새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아프리카 문양의 두꺼운 카펫은 모로코풍의 천장 전등과 함께 공간에 이국적인 온기와 편안함을 선사했다.

사라스바티라고 하는 슐츠 부인은 티크 목제 식탁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식탁 위에는 6구 촛대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에는 물이 담긴 크리스털 유리병과 빈 유리잔 두 개 그리고 카드 한 팩이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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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착오가 있습니다.” 요나단은 선 채로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오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요?” 사라스바티는 완벽하게 그린 눈썹 한쪽을 치켜 올렸다.

“아니, 오려고 하기는 했죠. 하지만 저는 단지 뭘 전해주려 왔습니다.”

“뭡니까?” 여자는 요나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어서 주세요.”

요나단은 자기도 모르게 가방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고 가슴에 밀착시켰다. “하지만 부인물건은 아닙니다!”

“제 물건이 아니라고요?” 나머지 눈썹 하나마저 치켜 올라갔다.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오셨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 같네요, 젊은이.”

“제가 자세히 설명할게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젊은이’라는 표현이 은근 신경 쓰였지만 그냥 넘기고 사라스바티에게 알스터 호수 주변에서 운동하다가 가방을 발견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요나단이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하며 재밌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걱정 말고 다이어리를 여기 맡겨놓고 가세요. 그 고객이 나를 찾아오는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고객이라고요?” 요나단은 거실을 훑어보면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실패였다. 사라스바티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상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녀는 식탁 위를 가리켰다. “저는 카드를 놓는 사람이에요.”

“카드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점술가이신가요?”

“‘인생상담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그러시군요.” 요나단의 머릿속에는 ‘야바위’나 ‘눈속임’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런 거에 관심 없으시죠?” 분명 이 여인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요나단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럼 한 번 해보세요. 정말 매혹적이에요!”

“흐음, 글쎄요…….”그는 여자의 제안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제가여기온목적은이다이어리가믿을만한 사람의 손에 가길 바라서입니다.”

“내 손은 믿을 만하지 않다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카드 점을 보는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다이어리를 잘 전해주겠다고 했는데도 맡기려 하지 않으니까요.”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요나단이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부인을 잘 모르잖아요.” 그는 다이어리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500유로를 떠올리며 그가 점쟁이라는 직업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편견일지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쪽도 언짢게 생각 말아요. 하지만 나도 그쪽을 잘 몰라요.” 사라스바티가 받아쳤다. “그런데도 그쪽은 지금 내 거실 한가운데 서 있군요.”

“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내 고객인 줄 알았죠.”

“그것 보세요.” 요나단은 의기양양해지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해야 한다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네?”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다시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면 우리 이렇게 하죠. 비밀스러운 다이어리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제가 방해되진 않을까요?”

“전혀요. 어차피 세 시간 동안 예약이 잡혀 있기 때문에 고객이 올 때까지 우리 같이 시간을 보내면 돼요.”

“세 시간이라고요?”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가 든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요나단은 의아해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보통 첫 상담 때는 그렇죠.” 사라스바티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다섯 시간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다섯 시간이요?” 요나단은 믿기지 않았다. “다섯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인생 얘기를 하죠.” 그녀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어떤 고객들은 계속 다시 찾아오죠. 우리 존재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죠. 한 번의 상담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얼마나 버세요?” 요나단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의 호기심이 너무 컸다.

“그러는 그쪽은 얼마나 벌어요?” 그녀가 맞받아치며 물었다. “그쪽 직업은 뭐고요?”

“죄송합니다.” 요나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그런데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런데 점술가라면 제 직업이 뭔지 알아맞힐 수 있지 않나요?”

“인생상담가입니다.” 그녀는 요나단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어쨌거나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그는 ‘업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그 분야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때그때 다르죠.” 사라스바티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무엇에 따라?”

“내게 상담받고 싶은 사람들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을 마음대로 정하십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녀가 말했다. “고객들의 지급능력도 고려하죠.”

“그렇다면 일종의 보조금 같은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녀가 말했다. “각 문제의 비중에 따라서도 달라요.” 그녀는 요나단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쪽은 비용이 저렴하진 않을 거예요.”

“저에 대해 전혀 모르잖아요!” 요나단이 어이없다는 듯 항의했다.

“이미 충분히 알아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쪽을 쳐다보기만 해도 다 알아요.”

“그래요?” 요나단은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놀랍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 매료당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라스바티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이는지 알려주시겠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지?”

“알려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내가 그냥 아는 겁니다. 그냥 갖고 있거나 갖고 있지 않은 재능이에요.”

“그렇다면 왜 카드가 필요한 거죠?” 그는 식탁 한가운데 놓인 카드 더미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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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목수가 망치를 사용하고 화가가 붓을 사용하는 것처럼.”

“망치와 붓?”

“카드는 내가 일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볼 수 있게 도와주죠.”

요나단은 식탁 쪽으로 몸을 숙였다. “죄송하지만 믿기 힘든 얘기네요.”

“믿고 안 믿고는 그쪽 자유에요.”

“그냥 평범한 카드인 거죠?” 너무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타로 카드입니다.”

“그러면 타로 카드를 섞어서 펼치고 짠! 하면 미래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있나요?”

사라스바티는 까르르 웃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내가 카드를 섞지 않아요. 고객들이 하죠. 그리고 나는 미래가 아닌 가능성을 봅니다.”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다! 가능성이라니.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기 마련이다. 내일 아침에 문밖을 나서다가 화물트럭에 치일 가능성도 있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사라스바티는 카드 뭉치를 손에 들고 요나단 앞에 펼쳐놓았다. “타로에서는 ‘상응의 법칙’이 중요해요.” 그녀는 카드를 한 장 한 장 내려놓았다. “우리의 모든 감정, 생각, 우리가 바라고 예감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알겠어요.” 요나단이 대답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어요.”

“좋아요.”

“제가 궁금한 건 어떻게 카드가 내가 기대하고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카드가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무의식이 그림이 상징하는 것에 반응해요. 꿈을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죠.”

요나단은 미심쩍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카드를 섞은 후 몇 개를 골라낸다고 쳐요. 그러면 그건 순전히 우연이지 제 의식이나 무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잖습니까?”

“우리 인생에 우연이란 없어요.” 사라스바티가 엄숙하게 말했다. “모든 것은 다 서로 연결되어있고 내면은 항상 외면에 상응하게 되어 있어요.”

요나단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저는 모르겠어요.”

“한 번 보여드릴까요?”

“어떻게요?”

“그쪽을 위해서 카드 점을 봐주면서 말이죠.”

“뭐라고요?” 요나단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됐습니다! 저는 단지 이 다이어리를 전해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네.” 그는 7시 15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그 사람이 나타나겠죠.”

“물 좀 드릴까요?”그녀는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영험한 돌로 생명을 불어넣은 물이죠.”

요나단은 그제야 크리스털 병 바닥에 보라색 돌멩이 몇 개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물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누가 알겠나? 박테리아나 우글거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자기 유리잔에 물을 따라 꿀꺽꿀꺽 마신 후 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좋아요!”

“흐음.” 요나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가 갑자기 경직되었다. 어서 빨리 그 고객이 나타나길 바랐다. 이렇게 늦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약속을 잡아놓고 통상 15분 정도 늦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술가는 전혀 개의치 않은 눈치였다. 편안하게 앉아 영험한 물을 마시며 요나단을 따뜻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고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만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일곱 시 반쯤 되자 요나단은 물을 마셔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물 한 잔 주시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따라주었고 그는 물이 상쾌하고 맛있어 놀랐다. 물에 정말 ‘생명을 불어넣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 즐겨 마시는 에비앙 생수보다 못하지 않다.

여덟시 십오 분 전. 요나단은 빈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안 올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사라스바티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세 시간이나 비워놓으셨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 있지? 그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타입이다.

“이미 계산하셨거든요.”

“선불로 받으세요?”

“페이팔이요.” 그녀가 설명했다.

“그게 뭡니까?”

“인터넷 지불 시스템이죠.”

“오.”

“아주 편리하죠. 고객들은 이메일로 내게 돈을 보낼 수 있어요.”

“이메일을 통해서 송금한다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지폐를 첨부합니까?”

“아뇨.” 그녀는 웃었다. “메일주소로 계좌가 운영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고객 이름도 아시겠네요.” 요나단이 말했다.

“이번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에 요나단은 크게 실망했다. “지급한 이메일 주소에는 이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어요. 게다가 오늘 상담은 누군가 고객에게 선물로 예약한 것이라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됐어요. 홈페이지에 예약 가능한 시간이 나와서 원하는 시간을 선택해서 예약할 수 있거든요.”

“홈페이지도 있으세요?”

“물론이죠. 나도 시대 흐름에 맞춰서 살아야죠.”

“네. 그렇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현대적인 점술가시네요.” 그의 말투에는 대단하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인생상담가.”

“네, 그거요.”

두 사람은 다시 침묵으로 들어갔다. 시곗바늘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앞으로 기어갔다.

“자,”낮은 종소리가 여덟 번 울리자 사라스바티가 입을 열었다. “고객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쪽 예상이 맞았어요. 내가 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겠네요. 그리고 내게 다이어리를 맡길 생각도 없는 것 같으니…….”

“누가 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요나단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가 듣기에도 절망이 가득 담겨있었고, 침착함을 잃은 자신이 민망했다. 게다가 왜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라스바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일이 그쪽한테 왜 그렇게 중요하나요? 다이어리 주인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하지만…….”그렇다. 하지만 뭐? 다이어리가 어머니 것일 수 있다고? 왠지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다고? 내 인생에는 별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데 이 일은 오랜만에…….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네요.” 요나단은 결국 순순히 시인했다. “이 다이어리를 그냥 유실물센터에 맡기고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일 낫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아몬드 모양의 눈으로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아서 요나단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부인도 예약자를 모른다고 하니…….”그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지불한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낼 수 있잖아요? 다이어리를 습득한 사람이 있는데 제가 보관하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되잖아요. 제 전화번호를 남기고 갈게요!”

“그럴 수는 있겠죠.” 사라스바티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으음.”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친절한 분이니까?”

“맞아요. 그렇죠.”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친절하니까 다시 한 번 카드 점을 봐주겠다고 제안할게요. 어차피 돈은 다 받았으니까.”

“아뇨, 아니에요.” 그는 계속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는 정말 관심 없어요.”

그녀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만이라도 우리 인생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고 그쪽이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요?”

“음…….”그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오?” 확고한 대답을 하려던 것이 마치 질문처럼 나왔다.

“아닌 거 같은데요.”

“부인이 왜 그렇게 제 미래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군요!”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사라스바티가 요나단의 말을 고쳐주었다.

“뭐든 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에 힘을 싣기 위해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동작을 취했다.

사라스바티는 등을 의자에 기대고 고개를 저으며 요나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두려워한다고요?” 요나단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앉았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한나
두 달 전, 10월 30일 월요일,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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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지몬은 환자용 침대에 똑바로 앉아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왼쪽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아픈 남자친구를 보자마자 한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다시피 했다. 가슴이 미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자기야!” 그녀는 지몬의 손을 잡았다“. 대체 왜 그랬어?”

지몬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대체 왜 그랬는지 물어야 하는 거 아냐? 내게 왜 그랬어?”

“정말 미안해.” 한나는 리자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괜찮아.” 지몬이 한나의 말을 끊었다. “나는 잘 살아남았잖아.” 그는 의사를 쳐다보았다. “푹스박사님은 내가 잠깐 졸도한 거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많이 심각한 건 아니야.”

“그렇습니다.” 의사가 거들었다. “하지만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의사는 엄격한 눈빛으로 좌중을 쳐다보았다. “환자분은 과로하셨고 감염에서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할 경우 정말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한나는 의사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무 잘못 없는 리자까지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침대에 누운 지몬는 혼자 즐거워 보였다.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처럼.

“특히 젊고 건강하신 분들이 감기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요.” 푹스 박사는 계속 설교를 이어갔다. “최악의 경우 감기 바이러스가 다른 기관을 공격해서, 예를 들면 심근염 같은 질환을 발생시킬 수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고요.” 듣고 있던 세 사람은 흠칫 놀랐다.

“너무 최악의 상황만 말씀하지 마세요.” 진정한 한나가 투덜거렸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의사가 조금 도도하게 말했다. “저는 최악의 경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의사로서 날이면 날마다 이곳에서 경험하는 것을 얘기할 뿐입니다.”

지몬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날이면 날마다요?”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푹스 박사는 한 발 물러서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환자분은 며칠 동안 절대 안정을 취하면서 쉬어야 합니다.” 의사는 차트를 들고 폭락한 주가지수를 검토하듯 잔뜩 찌푸리며 들여다보았다. “클람씨의 혈액순환은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링거액이 다 들어가면 간호사가 빼줄 테고 그럼 잠을 푹 자면서 쉴 수 있을 겁니다. 내일 아침에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의사는 계속 차트를 뒤적였다. “혈압이 아주 낮아요. 그 외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지만, 혈액검사 결과 몇 가지 이상 수치가 나왔습니다. 주치의를 만나서 재검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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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수치라고요?” 지몬이 되물었다.

의사는 차트를 덮고 지몬을 쳐다보았다. “염증수치가 상당히 높아 생리식염수 외에 항생제를 같이 처방했습니다.” 그는 링거액 봉지 두 개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알약 형태의 항생제를 6일 정도 더 드셔야 합니다. 퇴원 수속 시 드리겠습니다.”

지몬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밖에 가벼운 빈혈증세가 있어요. 감염성 빈혈 같습니다.”

“감염성 빈혈이요?” 리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일종의 감기 후유증인데 유행성 독감으로 인한 감염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폐렴 증세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한나는 점점 더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독감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억지로 어릿광대 의상을 입혔다니! 폐렴까지 발전하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쉬면 저절로 좋아질 겁니다. 환자분 나이에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푹스 박사가 설명했다. “그래도 다 낫고 나면 꼭 주치의를 찾아가 다시 혈액검사를 받으세요.”

의사는 계속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한나는 그의 과장되고 잘난 체하는 말투가 짜증스러웠다. 쯧쯧, 젊은 의사 양반이 이렇게 고리타분하다니!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흰 가운의 고매한 의사는 자신의 독백을 마쳤다.

“그렇다면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고 싶네요.”

“뭐라고요?” 의사가 어리둥절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지몬은 잡고 있던 한나의 손을 몰래 꼬집으며 말했다. “집에서는 절대안정을 취할 수가 없어요. 주인님이 저를 노예처럼 부리거든요. 선생님이 계시는 병원에서 제가 훨씬 더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종의 방어적 구금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방어적 구금이요?” 푹스 박사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리자는 배를 잡고 웃었으며 지몬도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이제 그만 좀 해!” 한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알아들었다고. 나를 계속 난도질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었어.”

“알았어, 자기야.” 지몬은 한나를 달래며 손을 잡았다. “재밌자고 하는 소리야. 너도 항상 재미를 추구하잖아.”

“그 재미를 위해서 누가 희생당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한나는 여전히 뾰로통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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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든 간에.” 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동료의 사인 하우스만 박사가 회진할 예정입니다. 내일 아무 문제가 없으면 퇴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환자분이 원하면 말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려는 듯 보였지만 간단하게 목례한 후 나갔다.

“휴!”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나구먼!”

“내 말이!” 한나도 동조했다.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내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어.”

“만약 그랬다면 쉽게 통과하지 못했겠지.” 지몬은 이제야 마음껏 웃음을 터트렸다. 한나는 지몬을 노려보았고 그는 방어하듯 손을 내저었다. “나는 사실 저 의사가 마음에 들어. 드디어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났잖아!”

“난 안 그렇단 말이야?” 한나가 격분하며 받아쳤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뽀뽀!” 지몬은 한나를 끌어당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한나는 웃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옆에 있던 리자가 말했다. “누군가는 꾸러기교실을 정리하고 청소를 해야지.”

“잠깐 기다려!” 지몬의 뽀뽀 세례를 받다 말고 한나가 소리쳤다. “같이 가자!”

“됐어.” 리자가 만류했다. “정리할 게 그리 많진 않아. 너는 그냥 우리 환자 곁에서 병간호나 해.”

“혼자서 괜찮겠어?”

“당연하지!” 리자는 미소 지으며 문으로 향했다.

“그럼 우리 내일 보는 거지?” 한나가 물었다.

“지몬이 너를 놓아준다면.”

“다시 한 번 강조할게.” 지몬이 끼어들었다. “나는 절대안정이 필요한 사람이야!”

“쳇!” 한나가 내뱉었다.

리자는 갔고 두 사람만 병실에 남았다.

“자기야.” 한나는 지몬의 가슴 위에 머리를 올렸다. “정말 대단한 소동이었어.”

“내 생각에는 별일 아니었어.” 지몬은 한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한테 병간호를 받는 기분도 괜찮은데?”

“있잖아.” 한나는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아까 자기가 기절해서 쓰러졌을 때 너무 놀랐어.”

“그랬어?”

“그럼.” 한나는 고개를 들어 지몬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진짜 무서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멋쩍게 말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건 그래.” 한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자기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쉿!” 그는 한나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한나를 향해 몸을 숙이고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나도 사랑해.” 그는 다시 한 번 키스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나한테서 그렇게 빨리 벗어나지는 못할 거야.”

“그러기를 바라!”

“그럴 거야!”

“그렇지?”

“그래, 그럴 거야.”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동안 너한테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어.” “뭔데?” 한나의 심장이 한 박자 쉬었다가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내심 기대했던 바로 그 질문일까? 여기, 병원에서? 하지만 어디든 상관없다. 청혼하기만 한다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오후의 사건으로 인해 청혼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인생은 짧고 유한하며 더 늦기 전에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루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뭐냐면…….”그는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였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말해.” 한나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그동안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이 뭐냐면…….”

“클람씨!”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고 통통한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이 힘찬 발걸음과 함께 춤을 췄다. “링거액이 다 들어갔으니 빼 드릴게요.” 아주 능숙하게 지몬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빼고 그 자리에 반창고를 붙인 간호사는 그들에게 짧게 목례하고 나갔다. 짧지만 강렬한 등장이군. 한나는 포니테일 간호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이야? 왜 하필 지금?

“하던 얘기 계속해봐.”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한나가 재촉했다.

“아냐, 나중에 할게.” 지몬의 대답에 한나는 매우 실망했다. 지몬은 크게 하품했다. “나 정말 피곤해. 좀 자야겠어.”

“정말?” 한나는 너무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자기가 잘 동안 여기서 기다릴게.”

“고마워.” 그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으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나는 내일 아침에야 깰 것 같은데.”

“상관없어. 그냥 여기 있을래.”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마. 너도 자면서 조금 쉬어야지.”

“여기서 잘 거야.”

“어디서?”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 불편한 의자에서 자겠다고?”

“힘들면 바닥에서 잘 거야.” 스스로도 이 말이 얼마나 무모하게 들리는지 느꼈다.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야 하는 상황은 아니니까.

“그러지 마.” 지몬은 크게 하품을 하며 예상대로 반응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아.”

“아까 하려던 얘기 말야……”한나는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몬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했던 걸까? 뭐야? 반드시 알아내야 해! 바로 직전까지 갔는데! “그 질문을 마저 할 생각은 없어?”

“다음에 할게, 알았지?” 그의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고 한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한나는 지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퇴원할 때 도와줄게, 알았지?”

대답 대신 나지막하게 코 고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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