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소중한 추억들 (마지막 회)

<당신의 완벽한 1년>

by 더굿북

요나단

1월 2일 화요일, 20:17

“일단 전체적으로 아주 좋아 보이네요. 길고 행복한 여생이 펼쳐져 있어요!”

요나단 N. 그리프는 자신이 조금 전에 왼손으로 뽑은 13장의 카드를 사라스바티가 비밀스러운 시스템에 따라 식탁 위에 펼쳐놓은 모습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켈트 십자가’라고 사라스바티는 표현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맨 위에 있는 카드를 톡톡 쳤다. 기사 갑옷을 입은 해골이 백마 위에 올라타고 있는 그림이었다. “말씀에 반박하고 싶진 않지만 제 눈에는 일단 죽음이 보이네요…… 심지어 아래쪽에 그렇게 쓰여있기까지 하네요!” 그는 카드를 건드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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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대답하자 소름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죽음을 단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해탈,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죠. 변환이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요나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요,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변화잖아요. 아직은 그런 변화를 겪고 싶지는 않지만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쪽이 뽑은 카드는 길고 충만한 인생을 보여줍니다.”

“그거 좋네요!”

“하지만…….”

“아하, 이제 안 좋은 얘기가 나올 차례군요!”

사라스바티가 엄격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입을 열고 펼쳐놓은 카드들 위로 몸을 숙였다. “그쪽이 그런 변화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어떤 변화들 말입니까?”

“쉿!” 그녀는 마치 파리를 내쫓듯이 손을 휘젓더니 손가락을 천천히 알록달록한 그림들 위로 움직였다.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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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현대인 중 걱정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고서 혀를 찼다. “말끝마다 내 말을 끊어버리면 오늘 남은 시간 안에 다 못 끝내요.”

“가만히 있을게요.”

그녀는 다시 펼쳐놓은 타로에 집중했다. “그러네요. 여기 아주 확실하게 보여요. 당신 안에는 당신을 마비시키는 강한 두려움이 맹위를 떨치고 있어요.”

요나단은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려다 포기했다. 앞으로 한 시간 반 동안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

“경직된 상태에서 벗어나 문제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녀는 어떤 젊은이가 낭떠러지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진 ‘바보’ 카드를 톡톡 쳤다. “카드들은 당신에게 좀 더 편안해지라고 조언합니다. 근심을 벗어던지고 고통을 붙잡고 있지 말고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려요.”

“저는 정말 근심거리가 없다니까요!” 결국 생각한 것보다 더 격한 어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 카드에 있는 젊은 남자는 언제든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데요!”

사라스바티는 언짢은 소리를 내더니 의자에 기대앉았다.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돼요. 그만두는 게 낫겠네요. 그쪽을 위해 카드 점을 봐주는 것은 무의미해요.” 그녀는 펼쳐놓은 카드들을 모으려고 양손을 펼쳤다.

“아뇨, 아니에요!” 요나단이 놀라 소리치며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사라스바티의 따가운 눈총을 깨달은 그는 당황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그가 우물거렸다. “이제 정말 입 닫고 있을게요. 약속해요!”

“좋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펼쳐놓은 카드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기 ‘지팡이 기사’가 있어요.” 기사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초록색 싹이 나 있어서 나뭇가지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카드는 당신에게 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합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한다고요. 지팡이는 불을 상징하고 활력과 움직임을 상징하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됐어요.”

무슨 방향인지 궁금했지만 입을 열 용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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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혼자 갈 필요는 없어요. 주위의 지지를 받게 될 겁니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노란 옷을 입고 역시 손에 긴 가지를 든 채 왕좌에 앉아 있는 여자의 그림을 건드렸다. “누군가 당신이 그럴 수 있도록 자극을 줄 것이고 당신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겁니다.”

“여자인가요?” 참지 못한 요나단은 또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또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어쨌든 당신 곁에는 강한 동반자가 있어요.” 그녀는 또 다른 카드를 가리켰다. “여기 성배를 든 여왕 카드도 있어요. 이 성배는 당신의 감정과 영혼과 관련된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요.”

“비밀? 무슨 비밀인가요?”

“그것을 알아내야 해요. 이건 아주 감정적인 카드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호소하고 있어요.”

‘피식.’ 사라스바티의 모호한 해석들이 슬슬 짜증 났다. 무엇이든 가능하면서 불가능한 얘기들이었다.

“당신의 직관에 귀를 기울여요.” 그녀가 충고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도 어떤 신호를 알아차리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요나단이 미심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사라스바티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주 간단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가리개를 차고 인생을 살아가죠. 그래서 운명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힌트를 알려주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요. 시야와 마음을 열고, 새롭고 낯선 길을 갈 자세가 되어 있으면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될 겁니다.”

“네에.” 요나단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까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또 핀잔을 들을까 봐 걱정했지만 사라스바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세요.” 그녀는 나란히 놓인 카드 석 장을 가리켰다. “당신은 올해 안에 누군가와 아주 친밀하고 결실을 맺는 관계를 갖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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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흥미진진해졌다! “아주 친밀한 관계요?” 요나단이 물었다. “어떤 관계인가요? 업무적 관계?” 마르쿠스보데를 월급사장에서 매출 지분을 나눠 갖는 사장으로 승진시킬까 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보데는 능력 있는 사람이고 최근 나눈 대화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애사심이 큰지 알 수 있다. 그의 노력에 제대로 보상해야 하지 않을까?

“글쎄요.” 사라스바티는 싱긋 미소 지었다. “백퍼센트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카드들을 조합해보면 곧 결혼할 수도 있겠어요.”

요나단은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이라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어요.”

그는 크게,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말씀대로 제가 올해 안에…… 만약 그렇다면 저는 이제 두렵네요. 몹시 두렵네요.”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걱정 안 해요. 당신의 해석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요. 저는 지금 여자친구조차 없다고요.” 요나단은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 싱글이며 여자를 만난 지 수백만 년은 됐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스바티는 침착하고 태연했다. “새해가 된 지 며칠 안 됐어요.”

“저는 말이죠.” 그는 여전히 히죽거렸다. “지금 당장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와 마주친다고 해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완전히 비이성적인 행동이니까요.”

“때로는 비이성적인 것이 가장 이성적이랍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적인 삶에서는 전혀 소용없는 소립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 같네요?”

“어떤 분야요?”

“실제적인 삶이요.” 사라스바티는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당신은 마흔 살이 넘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 여자친구나 동반자를 찾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그러기는 글렀군요.”

“이보세요! 저는 결혼도 했던 사람이라고요!”

“‘했던’이라고 하는 걸 보니 여자가 당신 곁을 떠난 이유가 있었겠죠.”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네.”

“아주 고맙네요!”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요나단은 이 매력적인 여인과 그의 사이에서 일종의 전기가 튀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티나와의 사이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수천 년 전 같았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상한 분위기에 자극받은 요나단은 대담하게 말했다. “당신도 아직 누군가를 찾지 못한 것 같으니 우리는 한 배를 탄 셈이군요.”

“뭐라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제는 당신이 점술가라도 된 모양이죠?”

“인생상담가죠.” 요나단이 그녀의 말을 고쳐주었다.

“내가 졌군요!” 두 사람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만나는 사람 있어요?” 웃음이 잦아들자 요나단이 물었다. 자기가 왜 이렇게 무례한 청소년처럼 구는지 몰랐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내 생각에 당신 인생에는 돌보고 손봐야 하는 데가 상당히 많아요.”

요나단은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요약해보죠. 일단 몇 가지 중요한 변화들이 예상되고 저는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어쩌면 결혼까지 하게 될지 모르고요. 그리고 어떤 신호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신호에 잘 응해야 합니다.”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제가 그런 신호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는 거죠.”

“그건 비교적 쉬워요.”

“어떻게?”

“그냥 ‘네’라고 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냥 ‘네’라고요? 이해가 안 되네요.”

사라스바티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담과 이브부터 전부 다 설명해야 이해할 분이군요.”

“이게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죠?”

사라스바티는 일부러 짜증 섞인 신음을 냈다. “정말 탁월하시네요.”

“뭐가 말입니까?”

“멍청한 척하는 거.”

“미안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닙니다.”

“알았어요. 설명해드리죠. 당분간 맞닥뜨릴 모든 문제에 ‘아니오.’ 대신 ‘네’라고 대답하세요. 예를 들어 평소 같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초대 같은 경우에.”

“그렇게 해서 저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되고, 지평을 넓히며, 운명이라고 부르든 우연이라고 부르든 기회를 주죠. 그러려면 반드시 모든 일에 ‘네’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이 다이어리로 인해 예기치 않게 당신을 찾아왔고 그로 인해 우리가 지금 제 카드 점을 보고 있는 뭐 이런 거 말씀입니까?”

“유레카! 드디어 알았네요.”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닌데요.” 요나단이 투덜거렸다.

“카드를 한 장 더 뽑으세요. 뽑을 때 당신이 알고 싶은 것에 집중하고.”

“알았어요.” 그는 부채꼴로 쫙 펼쳐진 카드들 위로 왼손을 들어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러면서 다이어리가 어디서 왔고 이 다이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자문해보았다. 놀랍게도 갑자기 손가락이 간질거렸고 그 손가락 바로 아래에 있는 카드를 골랐다. “이거요.”

“좋습니다. 카드를 뒤집으세요.”

그는 카드를 뒤집고는 사라스바티와 함께 ‘운명의 수레바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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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해요!” 사라스바티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보다 더 확실할 순 없어요!”

“네?”

“운명의 수레바퀴는 삶의 의미를 상징해요. 삶은 끝없이 돌고 돌죠.” 그녀는 매우 들떠 보였다. “생년월일은?” 그는 생년월일을 알려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생년월일을 적고 요나단이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에 따라 계산한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의 해를 숫자로 환산하면 역시 10이네요.”

“역시라고요?”

사라스바티는 요나단이 조금 전에 뽑은 카드에 적혀있는 ‘X’ 자를 가리켰다. “메이저알카나에서(타로카드의 중심을 이루는 22장의 카드-옮긴이) 운명의 수레바퀴는 숫자 10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올해는 커다란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행운도 함께할 겁니다. 올해 하는 모든 일이다. 잘될 거예요.”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요나단이 놀라며 물었다. “정말 굉장해요!”

“네, 정말 굉장하죠. 내가 보기에는 당신 앞에 완벽한 1년이 펼쳐져 있어요! 단지 운명에 순응할 용기만 내면 됩니다.”

“완벽한 1년이라고요?”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완벽한 1년.’ 그는 다이어리 첫 장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그녀에게 말한 적 없다. 이것이 정말 우연일까? 누군가의 의도적인 짓이 분명했다! “혹시 이 일기장 주인이 누구인지 정말 모르세요?”

사라스바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몰라요. 왜 내가 알 거로 생각하죠?”

“그냥이요.” 요나단은 사라스바티의 표정에서 수상한 낌새를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부당한 의심일까? 어제 아침부터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이것 역시 그런 일들 중 하나일까? “아무튼 올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려는 모양이네요”

“또 다른 질문 있어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어요.”

“하고 싶은 질문은 아주 많아요. 하지만 오늘 저녁으로는 부족하네요.”

“다음 예약을 잡으실래요?”

그는 손사래를 쳤다. “고맙지만 됐어요! 초감성적 세계로의 아주 흥미로운 여행이지만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사라스바티는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군요. 이것은 초감성적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일종의 대화, 당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당신을 진짜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거죠.”

“어쨌든 간에.”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주차유효시간이 벌써 두 시간 전에 지나버렸고 해야 할 일도 좀 있어서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 굳이 매일 10시에 책을 펴고 잠자리에 든다는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사라스바티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말을 할지 안 들어도 뻔했다.

“다이어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냥 유실물센터에 맡길까 해요. 그게 가장 이성적인 방법 같아요.”

“가장 이성적이기는 하겠죠.”

“무슨 뜻이죠?”

“잘 생각해보세요.”

주차한 곳에 도착한 요나단은 다음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a) 골프 자동차가 사라졌다.
b) 주차유효시간이 지나 벌금딱지가 붙었다.
c) 그리고 와이퍼 밑에 또 다른 쪽지가 끼어 있다.

그는 쪽지를 꺼내 펼쳤다.

친애하는 요나단 N. 그리프 씨,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길 바라고 귀하가 조금 비좁은 주차 공간과 같은 사소한 문제 정도는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차딱지를 받게 되신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무례한 차주로부터

요나단은 한숨을 쉬며 와이퍼 아래 벌금딱지를 집어 들고는 구겨버렸다. 놀랍게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나
14일 전, 12월 19일 화요일, 16:47

“으으, 진짜 추워! 걸어 다니는 고드름이 된 것 같아. 우리 다 같이 따뜻한 코코아를 마셔야겠어. 지금 당장!” 추위에 덜덜 떠는 일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황급히 들어 오는 리자의 볼은 빨갛게 터 있었다. 눈싸움을 하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들과 한 시간가량 에펜도르프 공원에 나갔다 온 것이다. 아이들은 모자와 머플러, 발열 방수 점퍼로 중무장을 하고 나갔는데도 꽁꽁 얼어서 들어왔지만 다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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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눈에서 뒹굴며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크고 단단하게 뭉친 눈덩이를 들고 낄낄거리며 상대편의 엉덩이를 정통으로 맞췄을 때의 희열이 너무나 커서 영하의 날씨나 감각이 없는 발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렸을 때 한나도 겨울에 눈이 내리면 열광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창고에서 오래된 나무썰매를 꺼내 한나를 태워서 가까운 공원으로 끌고 간 후 눈싸움을 했다.

“여보세요? 한나, 들리십니까 오바? 우리는 코코아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바!” 리자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한나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미안. 생각 좀 하느라.”

“그런 것 같았어.” 리자가 윙크하며 말했다. “멍한 눈빛으로. 지몬 생각했지?”

“틀렸어.” 한나가 말했다. “옛 추억.”

“그렇겠지. 소중한 추억들.”

“바로 그거야.” 한나는 주방쪽을 가리켰다. “코코아는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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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동상에 걸리지 않겠다!” 리자는 옷과 부츠를 벗는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한나는 여덟 명의 아이들과 반짝이는 금색 종이로 크리스마스 별과 천사를 만들고 있던 실내온도 22도씨의 놀이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나의 어머니 지빌레가 맡은 또 다른 그룹은 점심때 경찰서 견학을 하려고 나가 조금 후 돌아올 예정이다.

리자의 낙관적인 예측은 맞았다. 개업식 이후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은 식기는커녕 더욱 증가했다. 입소문이 좋게 났고 지몬이 신문에 홍보기사를 네 개나 올려줘서 블랑케네제와 자젤처럼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도 아이를 맡기려 일부러 찾아올 정도였다. 한나와 리자는 부모들을 달래고 대기자 명단에 올려야만 했다. 홍보기사를 본 한나의 옛 어린이집원장은 전화를 걸어 불평했다. “(미리 귀띔 좀 하지 그랬어요!”“말씀드렸는데 원장님이 귀담아듣지 않으셨어요.”)

넘치는 수요로 인해 한나와 리자의 어머니 지빌레와 바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고, 교육학을 전공하는 학생과 실습생 등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꾸러기교실은 대성공이었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모든 직원에게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50유로 정도 더 챙겨줄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한나는 가끔 왜 이걸 진즉에 실행에 옮길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안타까웠지만 이제라도 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벌써 확장 계획도 세워 놓았지만 당분간은 혼자만의 비밀로 할 생각이다. 과대망상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사업모델이 장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지 더 지켜보고 싶었다.

이 성공은 매우 기쁘지만 지지부진한 지몬의 상황 때문에 마음껏 좋아할 수도 없었다. 몇 주 전 기절했던 지몬은 병원에서 하려다 만 그 질문을 아직도 하지 않았다. 새 직장도 구하지 못해 여전히 기분이 다운된 상태다. 건강도 별 차도가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따금 성의 없는 지원서를 보내거나 다시는 예전처럼 건강해지지 못할 거라고 탄식하며 지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지몬은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거기서 무엇인가를 도출해내거나 푹스 박사가 조언했듯이 의학적인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한나는 그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몬은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일종의 우울증 상태라고 확신했다. 그의 신체적 증상들은 단지 정신적인 상태의 증상들이다. 그런 동시에 자신을 방치할 수 있는 완벽한 구실이 되어주고 있다.

결국 한나는 어제 아침 폭발하고 말았다. 지몬이 또 자기 집에서 쉬고 싶다고 해 한나 혼자 밤을 지새운 후였다. 한나는 지몬을 주치의에게 데리고 가 크리스마스 전에 철저하게 건강검진을 받게 했다. 오늘 오전 중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한나는 의사가 비타민을 처방했고 운동 좀 하라고 했다는 내용의 전화를 몇 시간째 기다렸다. 하지만 지몬의 전화는 없었고 그래서 상당히 초조했다. 먼저 전화하고 싶진 않았다. 지몬을 자꾸 재촉하고 ‘초조한 늙은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시간 좀 돼?” 6시 15분쯤 마지막 아이들이 가고 한나의 어머니도 나간 후 놀이공간을 대충 정리한 리자가 물었다. “다음 주 계획을 다시 상의해보자. 물론 네가 그러고 싶다면 말야.”두 사람은 연말에도 꾸러기교실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고객들이 특히 연말 시즌에 크리스마스와 새해 준비로 정신없이 바빠 육아를 힘들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꾸러기교실이 연말에도 운영된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자녀를 텔레비전 앞에 방치하지 않아도 되어 거의 울 듯이 고마워했다. 그것은 곧 한나와 리자가 휴가를 떠나는 다른 직원들의 도움 없이 연말에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의미다. 어쩌면 지몬도 함께.

“물론이지. 나는 아무 계획이 없어.”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크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거 별로 안 좋은 소리 같은데?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한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지몬이 걱정돼서 그래.”

“상태가 나빠졌어?”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좋아진 것도 아니야.”

“병원에는 다시 가봤어?”

“어제 아침에.” 한나가 대답했다. “내가 직접 실어다 날랐어. 그리고 오늘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을 텐데 아직 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그럼 별일 없는 모양이네. 너도 항상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하잖아.”

“그건 그래. 그래도 지몬이 별것 아닌 그 소식이라도 나에게 알려주면 정말 좋겠어. 난 지금 몇 시간째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여튼 남자들이란! 여자들하고는 다른 시공간에 사나 봐. 분명히 컴퓨터나 텔레비전에 푹 빠져서 여자친구가 손톱을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으며 초조해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겠지!”

“그러게. 네 짐작이 맞겠지?” 한나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지 리자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심한 농담을 했나 보다. 지몬에 대한 걱정이 정말 큰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야!” 한나는 불편한 생각들을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최근 지몬이 계속 기운을 못 차리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해.”

“너 아깐 별일 아닐 거라고 했잖아.”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말이야.” 한나는 리자의 말을 끊었다. “실직에 따른 상심이 커서 그런 것 같아. 그게 다야.”

“실직하고 연이어 감염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데?” 리자가 의문스러워했다.

“모든 것은 다 연관되어 있어.”

“그렇겠지.” 리자는 히죽거렸다. “아멘!”

한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것 봐!” 휴대전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한나가 소리쳤다. “역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한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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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지몬의 목소리는 어쩐지 둔탁하게 들렸다. 짧은 인사말조차 아주 차분했다. 한나는 갑자기 병원에서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손으로 짚어야 했다. “나야.” 지몬은 한나의 엉뚱한 인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이상했다.

“괜찮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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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자마자 한나의 몸에는 안도의 파도가 덮쳤고 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인 후 잠시 눈을 감았다. 리자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의사가 뭐래?” 한나는 눈을 지그시 뜨며 물었다. 리자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고 양손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지몬이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집에 가서 가장 예쁜 원피스를 입고 한 시간 후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거야.”

“뭐라고? 무슨 말이야?”

“빨리 집에 가서” 천천히 반복하는 지몬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일곱 시반까지 준비하라고.”

“왜?”

“비밀.”

“맞춰볼까?” 한나는 흥분해서 들뜬 목소리였다. “새 일자리를 구했구나!”

“그건 아니라서 미안해. 난 여전히 실업자야.”

“그런 비밀스러운 짓거리는 집어치우고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해주면 안 돼?”

“이따가 알게 될 거야.”

“지몬!” 한나가 화를 냈다. “무슨 꿍꿍인지 지금 당장 얘기해!”

“싫어.” 그는 전화를 끊었다. 한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리자가 물었다.

“몰라. 나보고 원피스를 입고 자기가 데리러 올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래.”

“새로운 직장을 구한 거야?”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흐음.” 리자도 한동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가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더니 마구 손뼉을 쳤다. “우하핫!

더 잘됐네!”

“뭐가 더 잘됐다는 거야?”

“한나!”리자는 친구를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주 뻔하잖아! 평소에는 이렇게 둔하지 않으면서 왜 이래?”

“뭔데?”

“오늘 아주 뜻깊은 저녁 시간을 보낼 것 같아. 지몬이 너한테 청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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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까?”

“당연하잖아! 새 직장을 구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겠어? 설마 자기 콜레스테롤 수치나 알려주려고 너한테 차려입으라겠니?”

“그렇겠지?” 한나도 수긍했다.

“와, 멋지다! 이제야 뭔가 진행이 되는구나!” 리자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말야.”

“미안해.” 한나가 위로했다. “너도 조만간 잘 맞는 남자를 만날 거야.” 한나는 양팔을 벌려 놀이방을 가리켰다. “봐봐! 지난 몇 주 동안 이미 흥미진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잖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는 정말 중요한 것 말이야. 정말 의미 있는 것. 뭔가……”리자는 적당한 말을 찾는 듯했다. “뭔가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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