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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n 07. 2016

02.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단 한 번 웃을 수 없던 <진짜 사나이>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 하던 반신반의는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저는 솔직히 이런 말이 어느 정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인지 그 깊은 뜻은 잘 몰랐습니다. 
     
제가 자란 곳은 지금의 동작동 현충원 남쪽 이수교라는 작은 마을(정금마을) 철거민촌이었고 그 곁의 현충원은 저희 놀이터였습니다. 당시는 월남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는데 많은 동네 형들이 전사해서 그곳에 묻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현충원에서 한 주에 두세 차례씩 합동 안장식이 열렸는데 저희는 구경하다가 군악에 맞추어 그 뒤를 따라갔고 행사 후에는 음식물을 얻어먹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자연스레 군인을 좋아하게 되었고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군문에 당당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높은 계급까지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제복을 입고 고급장교가 된 후, 명에 의해 보직이 바뀌어 유해발굴을 하다 보니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것이 아니었고 결국 제 가치관도 바뀌었습니다.
     
처음 유해발굴을 시작했을 때는 과연 유가족까지 찾을 수 있겠느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2000년 4월 13일, 경북 칠곡 다부동 369고지 9부 능선, 원형대로 남아 있는 개인호에 발굴 삽이 들어가자마자 드러나는 전투 유품. 삐삐거리는 금속탐지기의 경고음 소리에 가슴을 졸여야 했던 순간을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유해발굴사업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故 최○○ 일등병”.
     
“와, 뭐가 나온다!” 
그 순간 저는 다른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가 무전기를 들었습니다. “통제장교님, 삼각자와 유해가 나왔는데 이름이 있습니다.” 저는 벌써 369고지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한두 시간은 족히 걸려야 할 거리를 단숨에 올라섰습니다. 그토록 찾고 찾던 신원확인의 단서! 인식표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며칠간의 발굴 중에도 인식표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국군은 전쟁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피탈되고 한강대교가 폭파되자 남쪽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총도 차량도 심지어 입고 있던 옷마저도 한강 이북에 놓고 구사일생으로 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다수가 인식표는 고사하고 입을 옷도 없어서 피난 간 집에 걸려 있는 잠방이를 걸치고 신발도 주워 신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삼각자에 적혀 있는 내용은 한문으로 崔OO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육군본부에 연락하여 확인한 결과 17연대 소속 일병이었습니다. 유가족이 경기 화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쟁 전 결혼을 해서 따님이 한 분 계신다는 기록은 우리를 설레게 했습니다. 바로 육본에 올라가서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가족은 재혼하여 서울 정릉에 살고 있고, 유복녀는 문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굴 사업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유해. 최초, 최초, 최초라는 수식어를 아무리 써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신원 확인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 방송에 소개되고 여러 매스컴에서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부인되시는 엄 할머니를 업고 산을 오르는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50년 만의 부부 상봉, 50년 만의 부녀 상봉을 목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이 눈물로 곧 변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열차로 할머니와 유복녀를 서울에서 현장으로 모셨습니다. 4월의 태양은 너무도 따스했습니다. 발굴현장에 도착해서 무엇부터 보여드려야 할지 사실 겁이 났습니다. “유해를 보여 드렸다가 행여 졸도하시거나 살려내라고 막무가내시면 어쩌나…….” 이런저런 판단으로 먼저 유품부터 보여드려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습니다. 
     
“할머니, 여기 용사님이 갖고 계시던 만년필, 삼각자, 연필, 호루라기…….” 그 순간, “아이고 여보, 당신을 이제야 만났네.” 호루라기를 들고 울음을 터트리는 할머니, 그 호루라기는 전쟁 일주일 전 휴가를 나왔을 때 목에 걸고 있던 것이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방송으로 원대 복귀할 때 그대로 목에 걸고 갔던 물건이었습니다. “50년 동안 어디서 죽은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운 남쪽에 와 있으면서 꿈에도 한 번 나타나지 않았느냐?”며 주저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유해를 보여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놀라 절명이라도 하시면 큰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각자를 들고 이름을 보여 드렸습니다. 군에 오기 전 동네 한문 선생을 하셔서 글씨를 잘 쓴다는 이야기에 갖고 있던 만년필까지 확인시켜드렸습니다. 옆에는 태극기로 덮인 호국 용사 ‘최○○’의 유해가 부인과 당시 1살짜리였던 딸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사님은 전투화를 신지 못하고 장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두개골에는 북한군 권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탄두까지 그대로 있어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형용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번뇌하던 저는 이제 유해를 유가족에게 보여드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몇 번의 다짐을 받고 나서 저는 태극기를 들어 올리고 유해를 보여 드렸습니다. 두개골을 바라보고 장화를 바라보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마디 말이 없는 최○○ 용사. 그리고 그 앞에 선 부인과 딸!
     
“아버지, 어머니!” 우리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는, 한 살 먹은 딸의 오열, 그리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시는 부인. 저는 여기서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의 깊은 뜻을 절감했습니다. 차라리 제가 그곳에 전사하여 누워 있는 것이 용서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을 찾는데 우리는 너무도 긴 50년을 허비했습니다. 약식 제례 상이 차려지고 아내와 딸이 50년 만에, 남편과 아버지와 해후하는 순간입니다. 올려지는 술잔! 말없이 하늘로 오르는 향 꽃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후 대전 현충원에서 유가족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안장식이 거행되었습니다.
     
故 최○○ 유해의 안장 과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당시는 신원 확인을 위한 DNA 비교 등의 과학적 기법이 적용되지 못했고 예산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름 석 자만으로 맞는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의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슈퍼임포즈 방법(과거 얼굴 사진과 뼈대 특징을 비교하여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을 통해 정밀감식을 하기로 하고, 조선대 의대에 있는 윤○○ 박사의 주도하에 유가족이 갖고 있던 사진과의 정밀 분석을 통해 일치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여 최종 신원 확인을 하고 이렇게 안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 용사님의 친족 측에서 재혼하여 떠난 여자를 왜 데려왔느냐며 집안 인권 침해라고 고소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미 매스컴에 다 나가고 절차는 끝났는데 엄 할머니, 아니 그 당시 사랑한 아내가 대전 현충원 안장식에 올 수 없다는 강경 발언과 함께 집안 명예에 막대한 손상을 끼쳤다고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참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저는 화성으로 가서 동생을 독대했습니다. 전쟁 후에 해병대를 다녀온 분이었습니다. 없는 과거를 들춰낸 것도 아니고, 분명 그 피붙이가 생존해 있고 그의 엄연한 어머니인데 천륜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인권침해냐고 당돌하게 대들었습니다. 결국, 그 따님이신 최○○ 씨가 개입하고 친가 쪽에서 양보하여 재판까지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여운은 남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안장식 당일 날 그 할머니께서 현충원에는 오셨으나, 안장 장소에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나섰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리고 할머니를 모셔 왔습니다. 그 딸이 “엄마 이리 와. 왜 오지 못해?” “삼촌들, 우리 엄마 못 오게만 해 봐.” 하는 목소리에 현장을 지켜보던 100여 명의 많은 분이 모두 울었습니다. 친가 쪽 고모들도 드디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아, 왜 거기 있어, 와서 마지막 한 삽이라도 묻어야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의 눈물 많고 인정 많은 모습에 가슴이 훈훈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이 할머니 꿈에 최용사님이 나타나, “아직 갈비뼈 두 점이 남아 있으니 찾아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11년 5월에 다시 현장에 올랐습니다. 마지막 두 점의 유해를 찾고 싶어서였습니다. 녹음이 서서히 짙어가는 때라 탐사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늦은 가을에 다시 찾아보고 발굴 계획에 포함해서 정밀 발굴하여 마지막 갈비뼈를 찾아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은이 ㅣ 이용석

육군3사관학교 16기로 졸업한 후, 대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소위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다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육군 유해발굴 계획 및 통제 장교로 복무했다. 2003년부터는 포병대대장과 포병연대장을 역임하다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으로 2010년까지 5년간 재직했다. 현재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0년 제1회 조선일보·국방부 주관 위국헌신상 ‘헌신’부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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