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국가가 백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마지막 회)

<병서, 조선을 말하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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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지식인, 정약용

정조의 재위 시절 정약용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그야말로 ‘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예를 꽃피운 정조가 1800년 6월 28일 승하하자 조선은 말 그대로 나락에 빠져들었다. 어둠을 준비해야 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온 것이다.



정약용은 정조 사후 긴 유배 생활을 하며 다양한 책을 집필했는데, 그중에는 『민보의』라는 병서도 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대신 다스렸다. 이를 시작으로 왕의 장인이라는 강력한 뒷배경을 바탕으로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조선을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침몰해가고 있었다. 정조가 사라지자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빌미로 정적들을 숙청했다. 공격의 대상은 정조의 정치적 견해를 충실하게 수행했던 남인과 소론 시파였다. 그중 채제공 사후 남인 세력의 차기 지도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정약용은 유배 중에도 행정 기구 개편을 비롯해 관제·토지제도·부세 제도 등 국가 운영의 법규와 준칙을 논한 『경세유표』 등을 저술했다. 『목민심서』도 유배 시기 대표적인 저술이다. 조선시대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한 『흠흠신서』 등 어마어마한 대작도 있다.


백성이 스스로 방어해야 하는 시대

『민보의』는 1812년(순조 12)에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쓴 병서다. ‘민보(民堡)’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인근에 소규모 성곽이나 보(堡) 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방위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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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보의』는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백성이 스스로 목숨과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고육지책을 담아낸 병서다.

당시 지방 속오군은 폭정의 대표적인 예로 지금까지도 입에 오르내린다.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세금 착취로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관군은 이를 바로 진압하지 못하고 의병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진압했다.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의 눈에도 홍경래의 난은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다시 침략하기라도 하면 속절없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관직에 있을 때는 일본의 재침보다 북방의 적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상황 변동을 전하고 호남 지역에 일본의 재침에 관한 불안한 소문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민보의』를 저술하게 되었다.

『민보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관군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백성이 힘을 키워 스스로 자신의 삶터를 지키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내용을 보면, 평상시 미리 주민을 군사 조직처럼 편성하고 훈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쟁이 발생하면 모든 백성은 식량과 가족을 챙겨서 지역의중심 방어지인 성곽이나 보로 결집해 결사 항전의 태세를 갖추자는 것이 이 병서의 핵심 개념이다. ‘민보’는 이름 그대로 관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백성이 무장하고 전 국토를 요새화하자는 새로운 향촌 자치 방위 전략을 담고 있다.


이해받지 못한 향촌 방어

『민보의』에는 정부가 포기하다시피 한 관군의 전투력과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이 담겨 있다. 향촌 백성들이 자급자족적 공동체를 일구어가겠다는 이상적인 내용이기도 했다.

유배지에서 쓴 정약용의 글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구성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민보의』는 고종 대 신헌(申櫶)이 쓴 『민보집설』에 영향을 끼쳐 국가의 공식적인 비변책으로 채택되기도 했지만, 실제 지역사회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다. 『민보의』는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다면, 국민은 어찌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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