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잘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도, 결국엔 그 방점은 ‘잘하기 위해서’에 찍히는 바,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행하는 것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 지니는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 상태이다. 불안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어떤 미래가 다가온다 해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삶의 태도. 그 정도의 노력이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한 불안의 인문학을 이해하는 최대공약수이며, 그 이외에는 불안과의 대화를 통한 개개인의 체험적 인문으로 밟아가야 할 문제이다.
긍정적 기능이든 부정적 속성이든 간에, 그 불안이 존재와 인식의 기반이기도 하며, 모든 철학은 종국엔 불안에 대한 해명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을 투영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 난해한 철학의 언어들을 덜어내고, 일반 대중들도 쉬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로 갈무리하자면, 어떤 조건으로든 불안은 존재할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그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불안의 활용도를 고민해보자는 이야기이다. 그렇듯 우리의 삶이란 불안과 함께 살아지는 것이다.
내가 학부 전공을 한문으로 택한 이유는, 당시에는 내 모교에서 커트라인 점수가 가장 낮은과였기 때문이다. 결코 내 의지의 방향성은 아니었지만, 전공으로 익힌 《논어》와 《도덕경》이 아니었던들, 나의 지금이 글쟁이로서의 삶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학창 시절에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잘했었던들, 이 삶의 가능성을 비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껴간 그 가능성들이 지금보다 불행인지 행복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직접 살아보지 않은 경우들에 대해 어찌 함부로 예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삶은 이어진다. 어떤 삶이 이어질지 모르기에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꺾이면 꺾이는 대로, 늦으면 늦는 대로, 삶은 제 적소의 성질로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의 기투적 결론이기도 하다. ‘일어난 모든 일을 원하라’는….
이석주, <서정적 풍경>, 72x130cm, oil on canvas, 2000.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뒤꿈치를 비스듬히 들고서, 손가락을 집게 모양을 한 채로 살금살금 가다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날아가 버린다. 사방을 둘러보면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건만, 홀로 어이없는 듯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글을 쓸 때의 심정이다.”
연암 박지원이 《사기(史記)》를 생동감 넘치는 묘사에만 치중하여 읽는 절친한 벗에게 조언을 한 구절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크리에이터들이 이 애매모호한 글을 공감할 것이다.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다시 놓치는 그 무엇, 갈마드는 고통과 환희 속에 탄생한 창작이건만 돌아보면 한없이 부끄러워 다시 길을 잃는 허무함. 그런 의미였을까? 이외수 작가는 당신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늘상 ‘다음 작품’을 꼽는다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이란 그 무(無)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결핍의 상황에서 느끼는 긴장감이 발휘하는 효율성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예술가들의 열정 또한 불완전에 대한 아쉬움이 그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비어 있는 공간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결핍이 잉태하는 불안은 그자체로 채움을 향해 가는 역동성이기도 하다.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