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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5. 2018

01. 일본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개와 하모니카>




아릴드는 평소 엎드려서 잠을 잔다. 얼굴은 오른쪽 뺨을 베개에 댄 채 왼편을 향하고, 양 팔꿈치를 몸에 붙여 굽히고 손은 양쪽 모두 가슴 밑에 깐다.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쭉 펴지만 왼쪽 다리는 허리까지 무릎을 쭉 끌어올리고 무릎 아래로는 저절로 힘이 빠져서 오른쪽 다리와 평행이 된다.

다른 자세를 시도해본 적도 있지만 자는 동안 어느새 그 자세로 돌아가버린다. “덩치 큰 아기 같은 모습으로 자던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귀다가 석 달 만에 헤어진 여자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사실 아릴드는 갓난아기 때부터 그런 자세로 잤기 때문에 여자친구의 지적은 우연히도 정확했지만, 물론 아릴드 본인은 갓난아기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릴드로서는 어떤 모습으로 잠을 자든 편하면 그뿐이고 편안함이란 다시 말해 엎드리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그런 자세가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차선책으로서 옆으로 (당연히 오른쪽이 밑으로 가게) 누워 뻣뻣한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그 밑에서 두 다리를 나란히 구부린 채 어떻게든 의식이 흐릿해져서 잠 비슷한 것에 빠져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는 포기한다.

팔걸이에 달린 버튼을 더듬더듬 찾아서 독서등을 켰다. 눈이 전등 불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좁은 데서 다들 용케 잠을 자는구나, 하고 아릴드는 생각했다. 너무 조용해서 혹은 너무 어두워서 엔진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국의 히트송이 나오는 채널에 맞췄다. 하도 읽어서 등이 하얗게 꺾인 가이드북을 아릴드는 펼쳤다.

일본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디 있는 나라인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아들이 고작 일 년 만에 대학을 자퇴해버렸을 때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 —스웨덴에서 온 여행객 —와 약혼 —나중에 백지로 돌렸다 —했을 때도 놀라지 않던 부모님은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들인 자신을 그만큼 신뢰하는 거라 여기고 싶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반은 기가 차고 반은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걸 아릴드도 잘 안다. 어릴 때부터 늘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 것에 서툴렀다.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닌데 초등학교를 일 년, 고등학교를 이 년 더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회인 자원봉사자. 그것이 아릴드가 응모한 프로그램으로 구체적으로는 스키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스키 강습 및 지역 주민과의 교류. 베로니카 —스웨덴 여자친구 이름으로, 결혼은 없던 일이 됐지만 친구로서 지금도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조차 “너한테 딱 맞는 직업인 것 같아”라는 메일을 보내왔다(그 끝에 “무보수 일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라고 덧붙인 건 그야말로 현실주의자인 베로니카다웠지만).

무보수라고는 해도 항공료만 자비 부담이고 연수 기간을 포함한 5개월분의 체재비와 생활비까지 지급된다. 게다가 인생이란 돈을 버는 것이 전부는 아니잖냐고 아릴드는 생각한다.

연수는 도호쿠 지방의 야마가타에서 이루어지고, 그 뒤에도 듣자 하니 눈이 많이 내린다는 도호쿠 지방 어딘가에서 봄까지 지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며칠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관광을 할 예정이다. 일본. 도쿄.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닌가. 창문 덮개를 겨우 2센티미터쯤 살짝 올렸을 뿐인데 냉기가 느껴졌다. 윗몸을 웅크리고 그 틈새로 내다보았지만 그저 안개 같은 게 하얗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창문 덮개를 도로 내리고, 될 수 있는 한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아릴드는 옆자리 승객을 타 넘고 통로로 나섰다. 갑갑해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몸을 굽혔다 폈다 했다. 그러고 나서 통로를 오락가락했다. 목적도 없이, 천천히. 자칫 잘못해서 등받이를 잡아버리면 좌석이 흔들리기 때문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희한하게도 통로쪽 승객들은 모두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그렇게 좌우를 살피며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으려니 아릴드는 문득 자신이 객실 승무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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