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동안 살던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였다. 옆집에 사는 또래 엄마에게 이사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당연히 어디로 가는지 궁금할 것이고, 왜 가는지도 궁금할 거 같았다. 그런데 대화의 흐름은 갑자기 내가 부자인 것으로 종결이 되어버렸다. 자이로 이사를 간다는 이유로.
살던 동네는 두 딸이 두 살, 세 살 때부터 살았다. 남편의 발령을 따라 처음 간 도시였고, 부동산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때였다(정보를 떠나 부동산 자체를 잘 모르는 1인). 무엇보다 그 때는 둘째를 모유수유 하는 시기라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우연히 인터넷 카페를 통해 남편의 직장과 가깝고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라는 어떤 글을 보고 그 동네에 갔다가 새로 지어진 복층형집(빌라)을 만나게 되었다. 계단이 있는 이층집은 책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집을 만나게 되니 일단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거기다가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넓은 나무테라스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더 망설이거나 앞뒤 재고 할 것도 없이 남편에게 그 집으로 계약하자고 했다. 나는 그 집에 꽂혔다.
우리는 그렇게 그 집에서 둘째가 젖을 먹던 5개월부터 살기 시작해서 10살이 될 때까지 살았으니 8년을 꼬박 살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우리 가족은 집 뒤편의 산으로 다 같이 산책을 갔다. 그 산은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서 자주 가곤 했지만 그 날 따라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해서 내려가게 되었다. 산책로가 두 동네(행정구역상 두개 동)를 연결하고 있었는데, 8년 가까이를 살면서 단 한번도 옆 동네로 연결된 산책길은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가는 내내 우리는 울창한 숲길에 감탄을 연발하며 왜 이 길을 이제 왔을까를 연발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지점에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바로 자이 아파트.
단지는 깨끗했고 좋았다. 단지 옆이 바로 산이라 산책하기 좋다는 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고, 도대체 공기가 나쁠래야 나쁠 수가 없겠구나 싶은 아파트였다. 요즘 말로 숲세권 아파트. 부동산 앱을 켜고 그 아파트의 시세와 매물을 보게 되었다. 여러 개의 매물 중에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부동산에 전화를 했고 바로 그 집을 보게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또 반해버렸다. 아이들 방으로 쓰면 좋을 두 개의 방은 동쪽을 향해 있었서 앤의 초록지붕 집의 나오는 방과 같은 방향이었다. 거기다 동쪽에 산이 있어서 산을 바라보면 아침에 동트는게 보이고, 사계절의 변화를 산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순간 나는 두 딸이 그 방에서 앤처럼 상상력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거실은 남쪽과 동쪽에 모두 넒은 통창이 나있었다. 남쪽으로는 전혀 막힘이 없었고 탁트인 전망이 나를 사로 잡았다. 밝고 따뜻했다. 동쪽은 역시 산이 보이니 사계절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꽂힌 집이었다.
결혼해서 사는 동안 알뜰 살뜰 모아둔 돈도 조금 있었고, 아이들이 충분히 커서 자기 방을 갖고 싶어하는 틴에이저의 시점이라는 사실은 나를 그 집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 집은 우리집이 되었고 현재 그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네번째 집에 살고 있다. 아파트 세 번, 빌라 한번 그렇게 살았는데 빌라에 살았던 기간이 가장 길었다. 가장 길게 빌라에 살 때의 나는 좀 가난한 사람같았다. 친정 아빠와 오빠들은 얼른 그 빌라를 팔고 아파트로 이사가라고 틈틈이 이야기 했었다. 남편의 지인들도 왜 아파트에 살지 않고 빌라에 사느냐는 시선을 보내곤 했다. 빌라에 사는 내가 좀 불쌍하고 안되보인다는 시선을 받곤했다. 뭐 그래도 그 사람들이야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아니니 만날 때만 한번씩 그런 말을 들으면 된다. 그런데 동네에 사는 햇수가 늘어가고 아이가 자랄수록 만나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다. 동네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대답은 아파트 이름이었다. 아파트가 아니니 댈 이름이 없고 그래서 그냥 두리뭉술하게 'OO마을'에 산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오지랖 넓은 엄마들은 한마디씩 꼭 덧붙이곤 했다.
"빌라에요? 안 불편해요? 아파트가 편하지~"
" 아~ 빌라~~ 무슨 빌라? 왜 아파트 안 살아요?"
빌라에 사는 나는 행복하고 좋았지만 그런 말을 수시로 듣다 보면 나의 추억과 행복이 싸구려가 되고 초라하게 변질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우리 가족의 삶이 '빌라' 하나로 정의 내려져 버리는 순간들! 썩 유쾌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고 나서 나는 좀 부자인 사람이 되었다. 어디 사느냐고 묻는 질문에 간단 명료하게 '자이'라고 대답을 하게 되었다. 일단 그런 질문에 아파트 이름만 대면 되니 나는 참 편해졌고, 그 다음에 받는 시선과 듣게 되는 말들이란
"아~ 자이 살아요? 부자네~"
"자이~ 좋겠다. 나도 거기 살고 싶던데"
" 자이 많이 올랐던데, 좋겠다"
대체로 이런류의 말들이었다. 갑자기 나는 부자가 되었고 우리 가족의 삶은 '자이'하나로 정의 내려지기 시작했다. 빌라로 폄하되는 것보다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 또한 썩 유쾌하진 않다. 나는 그렇게 부자가 아니고 나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주거형태가 아파트다. 네모 콘크리트 박스 다 똑같아 보이는데, 건설사마다 영어 이름을 붙여 놓고 값을 먹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경쟁하듯 평가하고 순위까지 정하고 있다. 아파트 브랜드가 명함이라는 말까지 하면서자이, 아이파크, 힐스테이트, 더샾 등등(너무 많아 잘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은 '영끌'을 해서라도 브랜드 아파트에 입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입성하고 나면 브랜드 아파트의 값은 또 계속 오르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 그런데!
며칠 전 아이파크가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담고 '아이파크'라는 이름을 달고 높이 높이 올라가던 신축 아파트가 무너져내렸다. 아이파크를 짓는 현대산업개발의 주식은 폭락했고 어느 지역에서는 아파트 이름에서 아이파크를 빼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