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낮시간, 주로 오후에는 초등학생들과 독서교실에서 독서와 역사수업을 진행하고 밤에는 소수의 고등학생과 수업을 하고 있다. 전공도 그렇고 전직(입시강사)이 그러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알게 된 엄마들의 부탁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주2회만)에서 소수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나의 두 딸이 어릴 때는 저녁에 나가서 수업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무엇보다 입시강사 생활이라는게 성적과 직결되는 예민한 부분들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 맺어진 인연이 길어지고 그 사이 아이들이 성장을 해서 중고등학생이 되고도 나를 계속 찾아오니 내가 도움을 줘야할 부분이 자꾸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중등사회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게 나의 도둑질이다보니 큰 아이들과 밤에 만나서 공부를 하는 부분도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초보 엄마인 시절에 나는 아이보다 엄마인 내가 더 '분리불안'이 심하다는 걸 알았다. 아이와 쉽게 떨어지지 못했던 엄마였다. 그런 나인데, 그 사이 두 딸들이 초등고학년이 되었고 충분히 야근을 허락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해진 일이기도 하다.
이런 나를 두고 간혹 사람들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돈도 좋지만 애를 잘 키워야지!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수요일 밤 나에게 전화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말과 함께 그만 벌라는 말을 툭 던지는 그 동생처럼 말이다. 남들이 나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저녁 시간에 다시 일터에 나간다는 게 가끔은 싫을 때도 있다. 또 두 아이에게 미안해질 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속상할 때는 나의 이런 생활에 대해서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밤에 무리해서 나가는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말할 때이다.
내가 지금 무리하는 건가? 안해도 될 일을 하는 건가? 뭐 얼마나 더 번다고?
나보다 작던 꼬마 아이가 자라서 이제 나보다 키가 크고 성숙한 아이가 되어 나에게 온다. 시험점수 올려주는 도움도 있지만,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나에게 털어 놓고, 엄마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나에게 이야기 하면서 함께 나눈다. 그런 시간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아이라는 걸 아니 기꺼이 나도 나의 시간을 내어주게 된다.
임경선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리'라는 말이 버겁게 느껴지면 ' 최선의 성실함'이라는 말로 대체하면 된다.
남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쉽게 재단하고 평가의 말을 뱉어내곤 한다. 그 사람의 시간과 일은 그 사람의 가치가 녹아든 시간일텐데 자신의 가치와 잣대를 대서 평가를 내린다.
남들은 나의 시간과 일과 대해서 '무리'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나의 '최선의 성실함'과 '기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시간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