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은 강아지가 쓴 일기
어렸을 때 나는 내 이름이 뭔지 헷갈려했다. ‘아이고, 너무 예쁘다’와 그냥 ‘깨비’라는 이름 중에 어떤 게 내 이름인지 헷갈렸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예쁘다’라고 불러주었다. 그래서 한 동안 나는 내 이름이 ‘너무 예쁘다’인 줄 알았다. 엄마도 나에게 항상 예쁘다고 얘기해주었기에 난 그냥 그게 내 이름인 줄 알았다. 엄마와 달리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한때는 거울을 볼때 내가 엄마랑 너무 다르게 생겨 놀란 적도 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개들처럼 생긴 것을 보고는 너무 놀랐었다. 하지만 이내 나의 아름다움에 취해 내가 ‘개’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엄마 말대로 내가 어마어마하게 예쁘다는 사실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도 나만큼 예쁜 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내 이름이 깨비인 이유는 내가 하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집앞에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었다. 내가 작은 몸으로 집앞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나는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 품에 안겼다고 했다. 마치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 엄마도 나처럼 예쁘다. 예쁜 마음씨를 가졌고, 나처럼 예쁘게 생겼다. 엄마는 아주 길고, 아름다운 회색 털을 지녔다. 아마 내가 엄마를 보자마자 안겼던 것은 엄마가 나처럼 예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주로 노는 곳은 집앞 마당이다. 풀들이 있고, 가끔씩 큰 나무들이 있어 엄마 몰래 숨어있기에 제격이다. 가끔은 다람쥐 친구들과 새 친구들이 놀러와 같이 놀기도 한다. 엄마 몰래 마당을 나갈때도 있다. 엄마는 내가 사라진 줄 알고 놀랐다고 하지만, 너무 재미있다. 엄마는 내가 잠깐이라도 사라지면 놀라서 내 이름을 부르며 찾는다. 대체로 엄마가 부르면 바로 돌아가긴 하지만, 친구에게서 너무 재밌는 얘기를 듣거나 뛰어놀고 있을 때는 못들은 척 계속 놀때도 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수다쟁이 ‘럭키’이다. 요크셔테리어라고 하는데 엄마처럼 회색 털을 지녔고, 촌스러운 이름에 나만큼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개성이 넘쳐 아주 매력적인 친구다. 특히 재밌는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얘기를 해줄 때면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신은 럭키에게 외모는 주지 않았지만, 영특한 머리를 준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나보다 조금 더 살아서 조금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럭키는 나에게 가끔 꽤나 유용한 꿀팁들을 알려주는데 그게 생각보다 유용하다. 특히 먹을 거에 관련한 꿀팁들에 대해서는 정말 럭키가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럭키는 엄마에게 먹을 것을 받으면 소파 밑이나 엄마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들어가 까까를 모아둔다고 했다. 그러면 엄마가 밖에 나가있을 때마다 몰래몰래 조금씩 먹으면 엄마가 밖에 있는동안에도 신나게 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럭키가 알려준 꿀팁 중 가장 유용한 꿀팁이다. 거기다 엄마에게 먹을 것을 받을 때, 안먹는 척하며 몰래 조금씩 숨겨야하는데 이렇게하면 엄마가 어디가 아픈지 걱정하며 더 맛있는 음식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시도해보았다. 하루는 몸이 아파 아무것도 못먹는 척하며 누워있었다. 엄마는 와서 나를 안아주더니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물론 내가 엄마의 언어로 대답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지만, 엄마는 내가 쓰는 말을 거의 못알아듣는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과장해서 몸짓으로 표현했다. 어딘가가 아픈 것 같다고, 너무 아파서 더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다고 누워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나의 슬픈 표정에 같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혹시 음식이 안맞는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애틋하게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더니 내가 좋아하는 닭고기를 가져왔다. 나는 아픈 척 조금씩, 조금씩 먹었다. 엄마는 기특하다며 쓰다듬어 주었고, 조금 더 주었다. 아픈 척 하느라고 먹지 않은 사료는 엄마가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몰래 챙겨두었다. 똑똑한 럭키 녀석. 럭키는 절대 엄마가 사료를 빼돌리는 것을 봐서는 안된다고 했다. 엄마가 발견하게 되면, 바로 빼앗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못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전보다 덜 예뻐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난 럭키보다도 훨씬 예뻐서 그럴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 몰래 사료를 소파 밑에 숨겨두었다. 내일 엄마가 나가면 엄마 몰래 마음껏 먹어야지!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어디론가로 나가버렸다. 엄마가 매일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지만, 예쁜 나를 보기위해 항상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럭키에 의하면, 가끔 어떤 엄마, 아빠들은 우리들을 떠난다고 알려주었다. 특히 나이가 들거나 병이 있는 개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런 친구들이라고 했다. 럭키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점점 그런 걱정이 자라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럭키와 다르게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내가 나이가 들어도, 내가 아파도 항상 똑같이 나를 사랑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이면 오히려 엄마는 항상 나에게 맛있는 고기들을 준다. 그래서 난 걱정이 없다.
나는 엄마가 나간 문을 잠시 쳐다보다가, 어제 안먹고 모아둔 사료가 떠올랐다. 완전 많이 먹어야지! 엄마 몰래 먹는 사료는 왠지 평소에 먹는 사료보다도 더 맛있는 것 같다. 어제 남겨놓은 사료를 다 먹고, 이번에는 엄마가 나간동안에 먹는 사료도 다 먹어치워버렸다. 좀 나눠서 먹을 걸 그랬나? 배부르네. 엄마가 돌아오면 내가 얼마나 배가 산이 되도록 먹었는 지를 보여줘야지. 엄마가 또 귀엽다고 웃어주겠지? 난 엄마가 날 쳐다보며 미소지어줄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다.
배가 불러서 눈이 감겨오는데 창문 너머로 내리는 하얀 눈이 보인다. 어? 눈이 오나보다! 하얗게 내리는 눈은 모든 것을 하얗게 만든다. 그럼 난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소리를 지른다. 눈이다! 눈이다! 그럴때면 엄마는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지만, 엄마의 눈이 웃고있는 것이 보인다. 엄마는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날 데리고 나가서 함께 눈싸움 놀이도 하고, 발자국으로 엄마 이름과 내 이름을 만들고 들어오곤 한다. 오늘도 엄마랑 산책을 나가면 눈싸움 하고 놀아야지! …아직도 졸립네. 엄마는 언제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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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왔다! 문에서는 항상 엄마가 들어오기 전에 내는 그 소리를 냈다. 삐삐삐삑- 엄마다! 엄마가 들어오는데 엄마의 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엄마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먹을 거 냄새가 아니었다. 작은 사람이었다! 분명 엄마처럼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엄청 작았다. 아기인가 보다. 처음보는 사람 아기였다. 사람도 저렇게 작을 수 있구나. 강아지들처럼 작다. 나보다도 작아보인다. 엄마는 들어오면서도 계속 작은 사람만을 쳐다보며 들어왔다.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들어와서 쳐다보지 않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평소처럼 신나서 엄마에게 인사를 했는데 엄마는 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아버렸다. 나에게 인사도 안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엄마랑 산책 갈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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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째 엄마는 예쁜 나보다 신경쓰는 것은 아주 못생긴 저 아기라는 놈이다. 몸은 조그만해서 나만한데 못생긴게 엄마의 관심을 다 차지하고 있다. 엄마는 아기를 데리고 오고나서, 관심도 줄어들고, 산책도 못나가서 혼자 마당에 나가서 놀다가 올 때가 늘었다. 거기다 맨날 울고 떼쓰고 시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저 놈을 예쁘다고 한다. 못생겼구만. 우리 엄마인데! 저 아기가 엄마를 뺏어갔다. 우리 엄마인데!
더 이상 집에 있는게 즐겁지가 않아서 마당으로 나왔다. 럭키랑 놀면 좀 낫지 않을까했는데 마당 넘어로 보이는 럭키는 가족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고있었다.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다. 다들 행복한데 나만 이런건지 마당을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길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지나가진 않을까하는 바램으로 바라 보았지만, 오늘따라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앞발의 몸통이 축 쳐진채로 발을 질질 끌며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관심을 받고싶어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가 낮에 준 사료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몸을 동글게 말아 누웠다. 이러면 나의 엉덩이 체온이 내 얼굴에 전해져 누군가에게 기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나를 위로해줄 때 쓰는 방법이다. 아기만을 쳐다보고 있던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난 계속 그냥 누워만 있었다.
엄마는 계속 누워만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깨비야, 혹시 요즘 어디 아파? 아니면 아기가 와서 깨비가 외로워?” 엄마의 말에 뻑뻑하게 굳어있는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까까 먹을래?” 엄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엄마는 나의 모습에 크게 웃더니 맛있는 까까들을 종류대로 주었다. 금방 기분이 좋아진 나는 낮 동안 먹지 못해 비어있는 허겁지겁 위를 채웠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서 까까를 준다. 까까에는 엄마의 사랑이 담겨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기만을 사랑해서 나한테는 더 이상 사랑을 줄 수 없으면 어쩌지? 아기한테만 까까를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럼 럭키가 말한 것처럼 길거리에서 살게되는걸까? 엄마를 아기에게 잃는 생각을 하다가 까까가 목에 걸렸다. 켁켁켁.
나도 모르게 엄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잠시동안 먹지않고 조용히 있었다.
까까를 먹지말고 모아야겠다! 엄마의 사랑이 줄어들수록 까까도 사라질 생각에 다시 슬퍼졌다. 먹는동안 쫑긋 서있던 내 귀는 축 쳐졌다. 엄마의 사랑이 줄어들 생각에 슬퍼진 것인지, 까까가 사라질 생각에 슬퍼진 것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모두일 것이다. 나는 엄마가 다시 아기에게 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까까를 소파 밑에 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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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까까를 숨기면서 소파 밑에 쌓여있는 양이 꽤 되었다. 엄마의 사랑도 이만큼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만큼이나 쌓인 까까가 쌓이니 이 곳보다 좀 더 넓은 곳에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까까를 입으로 물어 마당에 조금씩 옮겨놓았다.
오늘은 럭키가 놀러와서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럭키에게 집에 아기가 놀러올 때마다 엄마의 관심을 뺏기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럭키는 놀라면서 소리쳤다. “안돼!!! 너도 이제 곧 떠돌이 개가 될거야!!!” 나는 놀란 눈으로 깨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왜?!” 아기가 생기면, 강아지한테 관심이 사라지고, 그러면 널 길거리에 버릴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서웠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이었다. “난 이제 어떡해야 해?”
럭키가 한참동안이나 마당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말을 꺼냈다.
“그럼 까까를 들고 여기를 떠나자. 까까 어딨어?”
“엄마가 없는 곳으로 떠나자고? 어디로?”
“우리 집에서 같이 몰래 살자. 그럼 돼. 내일 까까를 들고 몰래 나와. ”
다음 날 아침 엄마가 또 아기를 돌보고 있는 동안, 마당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관심이 모두 아기에게만 가있어 내가 빠져나오는지 조차 몰랐다. 내가 일부러 느리게 걷고, 소리도 쿵쿵 내어도 엄마는 알지 못했다. 마당에 까까를 놔둔 곳을 보는데… 까까가 사라졌다!
냄새를 맡아 이곳 저곳 맡아보는데 어느 곳에도 까까는 없었다…분명 저 먹보 럭키가 꾀를 쓴 것이 틀림없다. 엄마가 없는 곳으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까까를 훔치는 것을 꾸민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나서 땅에 발을 굴렸다. 엄마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울고 아무리 발을 굴려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큰 소리로 마당에서 울자, 엄마가 마당으로 나왔다. 엄마의 뒤로 작은 아기도 아장아장 걸어 따라나왔다. 아기는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도 아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가는 왠지 엄마를 조금 닮은 것 같았다. 엄마보다는 조금 못생겼지만, 그래도 조금 예뻤다.
아기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아기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아기가 나를 쓰다듬기 쉽게 해주었다. 아기는 나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둘이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