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람을 머금고 먼바다에서 밀려온 파도 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져 내렸다. 바람은 자꾸만 차가운 내 이마를, 감각을 잃어가는 뺨을 매만진다. 거칠던 호흡이 편안해지면서 나는 검푸른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슬픔, 그리움, 좌절, 분노 같은 모든 감정이 내 안에서 풀어져 나와 넓은 바다에 녹아들고,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느끼는 순간, 한없는 부드러움이 나를 감싸 안았다. 해체된 시공간의 틈에서 빠져나온 장면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며 흘러가는 것을 나는 본다.
그날, 엄마를 잃은 시간. 친구 집에서 게임을 하다가 새벽 2시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의 방문을 열어봤다면,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의식을 잃은 엄마를 살릴 수 있었을까? 내 삶의 일부는 그 시간에 갇혀 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후회와 책망. 엄마의 방문 앞에서 손잡이를 잡고 망설이다 뒤돌아서는, 용서할 수 없는 내 모습.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문 위에는 무성한 가시덤불이 자라고 빗장이 채워졌다. 그렇게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던 문이 지금 스르르 열리고 있다. 아침 햇살이 가득한 침대에 앉아 책을 펼치고 엄마가 환하게 웃는다.
-미안해요, 엄마. 그때 너무 철이 없었어요.
-네 잘못이 아냐. 슬퍼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어.
-엄마, 사랑해요. 이 말 꼭 하고 싶었어요.
-너의 빛이 이끄는 세상으로 가. 따뜻하고 용감한 아이. 엄마의 아들이 되어줘서 고마워, 은호야.
엄마는 읽고 있던 책을 나에게 내밀었다. 엄마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에 닿았을 때의 감촉, 그 따스함이 한 줄기 빛이 되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서서히 의식을 되찾아 갈 때 되감기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난 몇 시간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이브 몰 횡단보도를 건너 주택가 골목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 둔탁한 무언가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나의 모습. 컴컴한 주차장 구석에서 사정없는 발길질에 또 한 번 의식을 잃던 모습. 그리고 정신을 잃은 나의 머리채를 잡아 물이 가득한 욕조 속에 끝없이 쳐넣기를 반복하던 거친 손. 욕조 옆에 쓰러진 나는 물 밖으로 내던져진 활어처럼 온몸에 경련이 일고, 한참 동안 울컥울컥 마신 물을 게워냈었다. 욕실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이 난장판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는 영진이 모습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겨우 눈을 떴을 때 흠뻑 젖은 옷 위에 큰 타올이 덮여 있고, 등 뒤로 차갑고 질긴 감촉의 무언가가 또아리 틀 듯 두 손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소파와 티브이가 있는 작은 방, 불 켜진 채 문이 열린 욕실, 그리고 문이 닫힌 또 하나의 작은 방이 보인다. 내 맞은 편 소파에 앉은 한도영이 맥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의식을 찾은 내가 주위를 살피는 것을 보고 한도영이 말했다.
”니 스마트폰은 완전 방전이던데. 충전 중이야.“
한도영이 턱으로 가리키는 소파 옆 협탁에는 선정이의 하얀색 스마트폰이 충전 중이다. 가방에 들어있던 선정이 스마트폰을 녀석들은 내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내 스마트폰은 지금 어디 있을까?
”너랑 조용히 얘길 좀 하고 싶었는데 애들이 너무 거칠게 대했지? 미안하다, 은호야.“
”조폭들 대화법, 식겁하네. 닥치고 이 손이나 좀 풀고 말하지?“
”아, 미안. 애들이 깜박 잊었나 보네. 불편했겠다.“
가까이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는 한도영의 얼굴은 형광등 아래 평소보다 더 하얗다. 누가 저 말간 얼굴에서 ‘악’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녀석의 친절한 미소는 더 소름이 끼쳤다. 다정한 손놀림으로 내 등 뒤에 감긴 줄을 도영이가 풀어냈다. 돌돌 꼬인 전선 줄을 바닥에 툭 던져놓고, 소파에 앉은 도영이는 맥주캔을 새로 따 마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은호야, 오늘은 너랑 진지하게 얘길 좀 하려구 애들 저녁 좀 먹고 오라 내보냈어. 내가 보육원에 간 건 열 살 때야. 술만 먹으면 다 부수고 엄마를 두들겨 패던 인간이 엄마가 도망가니까 다음에는 나를 패더라구. 어느 날 죽도록 얻어터져서 갈비뼈가 나갔는지 끙끙대는데, 그 인간이 다 식어 빠진 햄버거 하나 달랑 안겨주면서 그러더라. 같이 있으면 도망간 니 엄마 생각이 나서 진짜 널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세상 아무도 믿지 말라구. 그러면서 날 데리고 간 데가 보육원이었어.“
”힘들었던 과거팔이로 지금, 니가 벌인 엄청난 일을 합리화 하는 거야?“
”아주 조금이라도 날 이해해줄 순 없을까? 니가 나한테서 뺏어 간 게 뭔지 잘 모르지? 보육원에 처음 간 날, 하루종일 내가 아무것도 못 먹는 걸 보구, 몰래 빵 봉지를 내밀고, 밤새워 말벗이 되어 준 친구가 지훈이었어. 항상 내 편이었던 지훈이, 니가 아니었으면 우린 멀어지지 않았을거구, 내가 이렇게 험한 세상으로 떠밀려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참 신박한 논리네. 니가 이렇게 된 게 내 탓이라구?“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은호 너는 나에겐 최악의 인연이야. 니가 등장한 이후로 내 인생, 누아르 장르로 갈아타게 됐거든. 됐고, 덕분에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만든 세상을 니가 또다시 무너뜨리려 하고 있어. 이번에도 내가 참아야 할까?“
”사람이 죽었어. 그러고도 너희들은 또 피해자를 만들어 아무렇지 않게 동영상을 유포했어. 니가 지키려는 세상 때문에 얼마나 더 피해자가 생겨야 할까?“
”그 애가 죽은 건 내 작품이 아냐. 나도 상관없고, 너도 상관없는 일인데 왜 미친놈처럼 파고들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 충고한 거 잊었어? 지훈이가 그동안 돈을 꽤 모았더라구. 낮밤 없이 알바 뛰고 라이더까지 참 열심히 살았어, 참 멋진 녀석이야. 우리가 관리하는 사이트 중에 핫한 데가 있거든. 거기에 지훈이 돈 싹 긁어 니 이름으로 계정 파서 이체했어.“
“뭐야? 니들. 지훈이 계좌 해킹이라두 한 거야?”
“왜? 해킹은 너만 할 줄 안다고 생각해? 우리 쪽에도 전문가 많아. 너 깨나길 기다리는 동안 내가 판돈 좀 키워주려 했는데 이런~ 벌써 개털 됐네. 어쩌지? 지훈이한테 미안해서. ”
한도영이 탁자 위에 종이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지훈이 계좌에서 2300만 원이 인출된 내역이 인쇄된 종이, 그리고 스마트폰에 접속된 도박사이트에서는 ‘알리바바 은호’란 닉네임으로 바카라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충전된 금액은 이제 184만 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이 솟구쳐 올라오더니,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까맣게 머릿속이 암전되며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았다. 세상은 ‘자립 준비 청년’이란 짧은 한마디로 지훈이를 정의하지만, 나는 안다. 보육원을 나와 막막한 스무 살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서, 누구의 도움 없이 당당히 홀로서기를 위해 지훈이가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치열한 시간을 살아왔는지. 지훈이의 꿈을 담은 3년여의 시간이 불과 몇 시간 동안 허무하게 증발되었다. 절대로 놈을 용서할 수 없다.
“지훈이는 죽을 때까지 너와의 인연을 저주할 거야. 금 같은 자기 돈을 도박으로 날려 먹은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ㅎㅎ 니들 사이도 이제 끝장이라구!”
“죽어!! 개새끼야!”
어느새 한도영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나는 미친 듯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나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한도영은 아무 저항 없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녀석의 하얀 얼굴 위로 울컥울컥 쏟아지는 선명한 코피 때문에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방문을 열고 나온 영진이가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함정이구나! 하고 느낀 순간. 영진이의 옆에 서 있는 성배가 집게손가락으로 멱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열연했네, 차은호. 이제 너 빼박 도박쟁이야. 친구 돈 끌어다 한탕 하고, 돈 좀 날렸다고 C발 막무가내로 폭행질이나 하는 니 제보 신빙성이 있을까? 우리도 자료 좀 제출하려구. 니가 얼마나 상또라인지. 이제 졸업도 물 건너 갔구, 대학두 끝난 거지? 니 인생도 이제 막장이야, ㅈ같은 새끼야. ㅋㅋ”
“괴물과 싸우는 자는 결국 괴물이 된다더니, 차은호, 사람 죽이겠던데? 지훈이 돈, 돌려받고 싶으면 닥치고 사건에서 그만 빠져. ㅎㅎㅎ”
한도영의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놈들의 무차별 난타가 시작되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끈적한 늪 속으로 나의 육체도, 의식도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이제 정말 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의식의 끈을 놓을 때, 어디선가 날아든 커다란 날개가 하늘을 뒤덮으며 희미한 한 조각의 빛마저도 몰아낸다.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학교에 침투한 조폭 세력의 범죄 행각이 선을 넘었습니다. 파주에 있는 한 모텔입니다. 어제 오후 경기도 서X 고등학교에 다니는 C 군은 하굣길에 교내 도박총판 조직에 의해 납치돼 이곳에서 네 시간 동안 물고문과 무차별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들 조직이 이런 대담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C 군이 교내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도박 불법 대출과 성착취 동영상 불법 업로드 정황이 담긴 자료를 한 언론사에 제보했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C 군의 친구 계좌에서 돈을 빼내 도박으로 탕진하고 C 군이 도박을 한 것으로 위장하려다,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범죄 행각이 발각되었습니다. 현재 C 군은 의식을 찾지 못하고 경기도 화양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SBC 뉴스 김지은입니다.
내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사건이 벌어지고 이틀 후였다. 속삭이듯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지훈이가 틀어놓은 유튜브 뉴스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창문 너머 아름드리나무의 초록 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목 뒤의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지훈이가 놀라 내 손을 꼭 잡았다.
“짜식~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몸은 괜찮아?”
“지훈아, 나 물 좀..목이 말라.”
침대 등받이 각도를 높여 나를 앉히고 지훈이는 유리잔 가득 물을 따라왔다. 그리고 곧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깨어난 내 모습을 환한 미소로 바라보는 지훈이, 맑은 두 눈에 왈칵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고인다. 그 선한 눈을 바라보자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아버님, 밤새 계시다가 좀 전에 교대했거든. 다시 오신대.”
“미안해...지훈아....”
“미친놈, 살아왔으니 됐어. 너 이렇게 멀쩡히 돌아오지 않았음 꼭지 돌아서 내가 무슨 사고 쳤을지 몰라. 그깟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지.”
설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터져버렸다. 지훈이가 나를 가만히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때 병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아빠가 뛰어와 우리를 얼싸안았다.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아빠의 눈물. 그동안 내 앞에서 무심한 척, 괜찮은 척, 꼭꼭 묻어둔 아빠의 슬픔이 내 마음으로 아프게 흘렀다.
“죄송해요. 계속 걱정만 끼치고...엄마 가버리셨을 때도 속으로 저 원망 많이 하셨죠?”
“무슨 소리! 그건 사고지,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엄마도 니가 힘들어 하는 거 절대 원치 않을 거야. 은호야, 이제 걱정 안해두 돼. 그놈들 싹 다 잡혀갔다. 너만 건강 찾으면 돼.”
“김화식 기자님이랑 경찰 대동하고 가서 한도영 패거리 한큐에 잡아넣었어. 놈들이 너 납치해서 폭행, 협박한 내용 뉴스로 다 공개되고 어젯밤에 시사포커스까지 방송 나가고 나니까, 여론이 광분의 도가니다.”
나를 살린 것은 선정이의 스마트폰이었다. 그날 내가 약속한 바비큐 파티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자, 아빠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 김화식 기자님은 얼마 전 깔아둔 친구 찾기 어플로 위치를 확인해 경찰과 함께 사건 현장을 급습했다. 내가 발견된 곳은 파주의 한 모텔. 머리를 맞고 쓰러진 내가 잠시 의식이 돌아와 모텔 지하주차장에서 놈들과 몸싸움을 벌일 때, 주머니에서 떨어진 내 폰이 그곳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놈들은 내 가방에 있던 선정이 스마트폰을 내 것으로 착각했다. 기막힌 타이밍에 도착한 선정이의 스마트폰이 나를 구하고, 놈들까지 잡아넣은 것이다. 선정이의 스마트폰이 모든 사건 해결의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선정이 스마트폰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