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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Nov 21. 2023

늦가을을 걸었다



요즘 매일 5 천보 정도 걷고 있다. 많은 분이 1만보를 걷는 중에 나는 겨우 5 천보를 걷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직은 시간과 체력을 핑계로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한다.      


작년에 우연히 참가한 지역 걷기 모임의 기억이 무척이나 좋았었다. 원주에는 치악산 둘레길이 현재 12코스로 개발되어 있다. 매달 한 번 3~12월 둘째 주마다 그중 한 코스를 걷는다. 작년 11월에는 중3 아들을 꼬셔서 데리고 갔었다. 가벼운 산책이라 생각하고 갔지만 10km 넘는 거리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을이 저물어가는 깊은 산속의 묵직함이 건네는 풍경은 지금도 내 기억과 심상에 남아 있다. 그저 동네에 흩날리는 낙엽 정도가 아니 한가득 쌓여있는 낙엽 무더기들은 내 온 존재를 감싸 안아주는 것처럼 안전함과 풍요로움을 넘어 아름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게 자연의 맛이구나.’     


‘이제 곧 겨울을 맞이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듯해요. 풍요의 시대를 지나 저물고, 사라져 버림이 쓸쓸함이 아닌 생의 한 면임을 아름답게 말해주는 듯했다.      


올해는 한 번도 함께 걷기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다시 생각이 났다. 이 모임은 11월까지만 진행하기에 얼른 신청했다. 너무 늦게 신청했는지 대기자 명단에 들어갔다. 내년에나 참여해 봐야겠다 하고 잊고 있었는데 하루 전날에 한 명이 취소했다고 연락이 왔다. 다행히 특별한 일정이 없었기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영하 0.3도, 작년과는 사뭇 다른 온도의 날이었다.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단단히 채비하고 만남의 장소로 출발했다. 약간 쌀쌀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접수받는 곳에서 누가 기증한 빼빼로 과자 하나와 물 한 병을 받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후 버스로 이동했다.      


작년에는 치악산 둘레길을 걸었는데 올해는 원주 굽이길 코스로 걷는다고 안내자가 설명해 주었다. 내년에는 다시 치악산 둘레길 코스 매년 번갈아 가면서 걷는다고 한다. 둘레길은 치악산을 걷기에 흙길인 반면, 원주 둘레길은 원주 근교라 대부분 평지를 걷는다. 치악산을 걷는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평지라는 말에 약간 실망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묘미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30분을 이동해서 ‘귀래’라는 곳에 도착했다. 가까운 곳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중심을 한참을 벗어난 곳이었다. 20대에 몇 번 와 봤던 장소, 이곳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어릴 적 동네처럼, 거리도 식당 간판도, 그래서인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귀래 시가지를 벗어나 좌우로 들판이 보이는 길로 걷기 시작했다. 옆에는 어제 영하로 내려간 날씨로 인해 서리 한가득 맞은 배추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논밭 시골길을 걷다가 차가 다니는 도로 쪽으로 걷다가 다시 밭이 있는 길을 걷다가를 반복했다. 간간이 집들도 보였고, 그중엔 정말 어릴 적에나 볼 수 있는 옛날 한옥집, 이곳까지 들어와 누가 사나 할 정도로 드문 인적이 있는 곳에 현대식으로 지은 집도 있었다. 대문도 없는 집 마당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장 담그는 모습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걸으며 생각하며


오르막길이 계속되고, 1시간 즈음 걸었을 때 내 평소 운동량을 넘어가고 있었는지 갑자기 여러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지루함이 느껴졌는지 하품도 나왔다가, ‘산티아고 길을 걸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했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가 ‘괜히 왔나?’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영하의 날씨는 지나갔는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날씨 체크를 했는데 아직 3도다. 날씨가 좋아진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서였다.      


이런 나의 지루함과 온갖 잡생각을 벗어나게 해 줄 장소가 곧 주어졌다. 걸을 때마다 간판에 계속 보였던 ‘용화사’라는 절이었다. 이곳은 스탬프가 (코스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절인데 사뭇 느낌이 조금 달라서 옆 일행에게 ‘여기 절이 맞지요?’라고 물었더니 “맞아요”라고 하신다. “근데 중국에 그 유명한 소림사와 관련한 절의 한국 지사 같은 곳이에요.” “아하! 그렇군요. 어쩐지 느낌이 조금 달랐어요.” 그러면서 자신은 중국인이라고 하신다. 다시 살펴보니 한국의 보통 절과는 다른 느낌의 조각상, 인테리어 등이 보였다.      


암튼 내 정서와는 맞지 않았지만, 새로운 느낌의 경치와 절을 구경하느라 위기의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러가 버렸고, 다시 걸을 힘이 주어졌다. 스탬프를 찍었으니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이 정도 코스면 괜찮네.’라는 가벼운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진행자 같은 한 분이 아직 가려면 2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왜 이리 천천히 가지?’ ‘이 정도면 오늘 거뜬히 걸을 수 있겠어.’라며 걸음을 재촉하며 앞서 걷는 이들을 앞지른다. 그런데 1~2시간을 걸으니 점차 뒤처지게 되고, 무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앞에도 한 무리, 뒤에도 한 무리. 나는 중간에 혼자 뚝 떨어져 있다. 오랫동안 참여하신 분들인지 수다가 멈추지 않는다.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듣고 싶은데 앞뒤로 대화 소리가 한가득하다. 그래서 잠시 떨어져 나온 혼자의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혼자라는 ‘자유함’과 무리에서 떨어져 있다는 ‘불안’이 동시에 밀려온다. 사람은 이렇게 모순적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힘주어 신나게 걸었다. 처음의 온갖 상념은 흐릿해지고 무념무상의 시간이 주어졌다. 내년 트렌드 중 하나에 ‘분초 사회’라는 것이 있다. 이제 시간도 ‘분’이 아니라 ‘1초’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시간 활용을 말한다. 나는 이 시간에도 무언가 생산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걷는 시간은 이 모든 시간 개념을 허문다. 생산성 없이 몇 시간을 그저 하염없이 걷는다. 생산성에 중독된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다.           





함께 걸으면 좋은 점      


이렇게 5 천보 수준의 걷기 실력에서 오늘은 12km, 2만 보 이상을 걸을 수 있었다. 평상시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함께여서 가능했다. 독서도 글쓰기도 운동도 혼자 하면 원래 수준이 멈춰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누군가 함께하는 동료는 지루함과 위기의 순간을 이기고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 준다.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세 번째 책 출간 이후에 이런저런 운동 모임을 기웃거렸다. 여러 개의 모임이 검색되었지만 누군가의 추천 없는 모임에 막상 가입하려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분이 등산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 걷기 모임은 11월이 끝나 가지면, 겨울에는 산행을 해요.” “예? 산행이요.” “그런 모임이 있나요?” “제가 속한 모임이 있는데 한번 와봐요. 00 산악회. 밴드 검색하면 있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검색을 해 봤는데 본 거 같아요.” “어떤 모임에 가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간식타임이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분이 “혼자 오셨어요?”라고 물으며 “함께 먹어요.”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하나만 준비해 왔는데, 오랫동안 참여하셨던 분들인지 잠깐의 쉼을 즐기듯 간식들을 쏟아내신다. 오른쪽에 앉은 한 여성은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다며 쑥떡 하나와 감을 내어 주시고, 왼쪽 한 남성분은 믹스 커피를 건네주신다. 한 여성분은 지나다니시며 껌과 사탕 한 알을 손에 쥐어 주신다. ‘정이 넘치는 공간이구나.’      


떡과 과일을 주셨던 여성분에게서도 트레킹과 등산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000 산악회에도 소속되어 있어요. 걷기 모임이 끝나지만, 산악회에서는 겨울에도 여러 모임을 진행해요.” 마지막 걷기 모임이지만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모임에서야 참여하게 되어 아쉬움이 있었는데, 다양한 지역 모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오프라인 모임은 잠깐의 만남이지만 검색에서 알 수 없는 또 다른 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년의 트렌드 중 하나가 인플루언서나 지인의 후기의 중요성이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 많은 이가 지식의 함정에 빠지고 결정 장애, 선택 장애를 겪는다. 그때 아는 누군가의 추천 정보는 빠른 결정을 돕는다. 물론 이 또한 검증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느슨한 오프라인 모임일지라도 이곳에서 만난 이들의 추천은 신뢰를 더한다.      

또한 디톡스의 시간이 된다. 매일 글과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이에서 조금 벗어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지나친 몰입은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트린다. 일상의 흐름을 잠시 벗어나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키는 매일 10km을 뛰었다고 하는데 아직 그만한 체력은 되지 못하며, 우선 걸으며 체력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렇게 함께 걷는 모임에서 매일의 목표 수치를 훨씬 넘는 기록을 남겼고, 정을 얻어먹었고, 화려하지는 않은 풍경이지만 겨울 초입의 자연을 만끽했다. 이곳에서 얻은 정보는 새로운 만남과 라이프 스타일을 가져다주어 내 삶에 또 다른 활력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소소하지만 낯선 것과의 조우는 언제나 반갑고, 자극이 되며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해 줄 것을 잠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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