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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스테 Aug 03. 2020

잠시, 시칠리아로 데려다 놓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여행에 관련된 에세이는 여행을 가지 못할 때 읽으면 더 좋다. 올리브 오일에 양파를 볶은 달큼한 냄새가 나는 여행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 내게 문득 떠나라고 하면 어느 도시가 떠남의 이유가 될까? 아마 가보지 못한 남미 '부에노스 아이레스' 나 카리브해 '하바나'가 생각난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길을 잃을 기회가 없지만 김영하의 오래전 시칠리아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기차는 오지 않고 수없이 길을 잃으면서 만나는 시칠리아의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 작가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느리게 걸었고 깊이 사유하지 않았을까. 시칠리아를 여행할 수 있을까. 각각의 도시들의 역사, 전설과 신화에 얽힌 이야기와 작가만의 에피소드를 담은 글은 적절하게 어우러져 섞어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신화와 역사의 삼각형 모양의 시칠리아. 삼각형의 세 변은 각각 유럽과 아프리카와 그리스를 바라보고 있다. 등을 돌린 도시들은 각각 유럽과 아프리카와 그리스를 닮아 있다는 것. 아쉬웠던 점은 시칠리아의 도시 이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지도를 적절하게 섞어놓았으면 했다. 어디가 동부 쪽이고 남부 쪽인지 몰라서 혼동이 되었다. 나중에 시칠리아 지도를 펴 놓고 읽었다..


작가 나이 마흔,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라는 주제를 마지막 강연으로 마치고 학교를 떠난다.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는 아마 작가 자신이 찾고 싶었던 영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다큐의 촬영을 계기로 시칠리아의 여행 경험이 있던 작가. 시칠리아가 작가의 마음을 다시 붙잡았던 것 같다. 몰려드는 이탈리아의 관광객의 무리들 속에서 벗어나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작가는 아마도 그런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여행, 밴쿠버의 일 년 동안의 삶을 계획하면서 작가는 깨닫는 과정은 영국, 뉴질랜드의 짧은 해외 생활을 위해 집안의 모든 것들을 정리했던 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 사항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35쪽)라는 작가의 말을 빌려본다..


로마를 여행 과정 그리고 반도에서 섬까지 가는 시칠리아까지 가는 험난한 과정을 힘들었겠지만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이탈리아 기차는 시간에 맞춰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을 때 가는 것.'은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메시나에서 페리를 타고 리파리 섬부터 시칠리아의 첫 여행이 시작된다. 점심에 와인을 마시며 두 시간 떠들고 약간의 낮잠을 자고 난 다음 다시 여는 가게들. 바삐 돌아갔던 한국에서의 일상, 로마에서의 지쳤던 여행은 시칠리아만의 느리게 돌아가는 시계에 누구라도 맞춰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칠리아 지도

리파리 섬에서 숙소를 찾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 참 재미있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세계가 물, 불, 흙 그리고 공기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을 연상시켰다. 샤워는 물, 부엌은 불, 발코니는 흙, 마지막으로 냉장고는 차가운 공기와 관련돼 있었다. 현대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오래 어딘가에 머물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들' (83쪽)


이천여 년 전 그리스 비극을 상영하던 타오르미나의 반 원형극장에 영화 <대부>를 떠올리면서 복수의 연쇄를 상기하고 그리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로 연결하는 부분은 역시 김영하 작가다 싶은 부분이다.. 로마가 경영한 최초의 식민지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영화 <스파르타쿠스>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차를 몰아 에리체를 올라가면서의 풍경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섬 라퓨타>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묘사하는 부분처럼 말이다..



오래전 영국에 잠시 거주할 때다. 시칠리아에서 온 여성과 짧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아래에 있는 어떤 섬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당황했던 나에게 그녀는 시칠리아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면서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말했다. 지금 이 책을 읽어보니 그녀가 시칠리아 시라쿠사 출신이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산타루치아 축제는 어떤지, 시칠리아의 최고의 바로크 도시라고 하던데 실제로 그런지 물어보고 싶다.


작가는 스쿠터로 타고 절벽을 향해 갈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햇볕으로 단련된 과육들이 농익은 냄새를 풍기는 과일. 붉고 노란 오렌지, 연두색과 자주색의 포도, 붉은 딸기. 이곳에서 한 달 동안 햇빛을 쪼이며 빵 몇 조각과 커피 한 잔 그리고 농익은 과일을 먹으며 걱정 없이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크식 건물과 중세식 좁은 골목은 아니더라도 지중해의 수평선과 바싹 내리쬐고 사이프러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잠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책이었다.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예기치 않은 낯선 날것들과 마주하고 싶었다.



작가의 풍성한 시칠리아 글에 잠시 푹 빠질 수 있는 책.



<추천>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혀지고싶을 때

지중해의 햇살이 그리울 때

일상에서 잠시 벗어하고 싶을 때


<블로그의 독후감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을 모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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