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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ehyun Kim Dec 04. 2017

책과 나: 악의 진화

종의 기원(정유정)을 읽고

며칠 동안이나 여운이 남았다.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깊숙이 숨어 마스크를 쓰고 망토를 두르고 있던 악(惡)의 흰 얼굴과 마주한 느낌이다.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 무서운 책이다.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프레데터라고 불리는 순수 악인이다. 어린 시절 주인공은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머리를 우산 꼭지에 꽃은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가족 여행 중 절벽에서 형을 발로 차 떨어뜨려 죽였고, 형을 구하려던 아버지도 죽였다.


이후 어머니는 그에게 매일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 그 약은 내면의 악(惡)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누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약을 먹는 것을 중단했다. 억눌려 있던 감각이 살아나고, 신체는 민첩해지기 때문이다. 약을 끊을 때마다 억눌러 있던 살의가 깨어났다. 피 냄새를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싶어 졌다.


약을 끊은 지 나흘째 되는 어느 날, 그는 밤늦게 퇴근하는 여자를 죽인다. 그리고 그의 살인을 알아차린 어머니도 죽인다. 한번 시작된 살인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모를 죽이고, 친구를 죽인다.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과 제목이 같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 이론을 다뤘다. 이론은 이렇다. 최초에 어떤 것이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변이(變異)가 생긴다. 변이는 형질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형질은 생존에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다. 불리한 것은 소멸되고, 유리한 것은 보존된다. 변이는 계속되고, 생존에 유리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보존된다. 반복된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은 원시생물로부터 진화했다.


정유정'종의 기원'은 진화된 인간의 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의 악은 진화했다. 잔인함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공격성은 명확하다. 감정과 행동이 대체로 직결된다. 상대를 죽여야 할 때는 먹이를 구하거나 다른 이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뿐이다. 자신의 생존과 관련 없는 죽임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생존을 위협받지 않더라도 오로지 쾌락을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감정을 숨길 수 있고, 그 감정과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살의를 숨기기 위해 선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친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숨길 수도 있다.


인간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희대의 살인마, 세기의 살인마가 한해 걸러 한 두 명씩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더 진화된 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진화는 제발 그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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