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부담하려고 할 때 덜어지는 마음의 짐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전쟁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면 오히려 살아남을 것이고, 살려고 숨기만 하고 제대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다.
하지만 오늘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렇게 거창한 교훈은 아니다. 그냥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소개해보려 한다.
회사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분이 있다. 꽤나 중요한 팀에서 근무하고 계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의해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문의할 때마다 짜증 내는 소리를 듣거나 상대방에게 그것도 모르냐며 면박을 주는 일이 잦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그 분과 접촉해야 할 일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연락을 했다.
지레 겁을 먹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친절한 반응에 되려 놀랐다. 이 분은 내 문의 사항을 듣더니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며 자기도 관련 업체에 문의를 해 봐야 한다고 기존 문의 양식이 아닌 간단한 메일로 정리해서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날 나는 그분께 문의사항과 함께 협조를 바라는 메일을 보내고 퇴근했다.
다음날이었다.
"메일로 이렇게 주시는 게 아니라요. 양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요청하셔야 합니다."
'엥? 본인이 양식이 아니라 메일로 주라고 해 놓고서는 웬 딴소리? 당신이 이렇게 얘기를 했었고 나는 그걸 따랐을 뿐이라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백만 번쯤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결국 이 일은 저 사람이 나를 도와줘야 처리 가능한 거고, 내가 잘못이 없다는 걸 말해봤자 실수를 인정해야 하는 저 사람 기분만 나빠져서 협조가 더 안 되겠지.’ 하는 이성적인 생각이 들어서 참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간단하게 말하고는 말한 대로 정식 양식에 맞추어 요청을 넣었다. 그 담당자는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더니 내게 간단히 해결이 가능하겠다는 답을 줬다. 나의 메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는 우호적으로 나를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생활이 너무 힘겨웠던 막내 시절, 내 마음속에는 이 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나한테 왜 이래요!'
그래서 내 일이 아니라면 아주 사소한 일조차 더 부담하지 않으려 참 많이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부탁을 가장한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 사람들이 짐스럽게 느껴졌고, 그들을 경멸하는 마음도 커졌다. 그리고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듯한 낌새가 보이면 날을 세워 반응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다. 약간의 여유가 있달까? 작은 부탁 정도는 '나니까 해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네~제가 할게요!”라고 대답한다. 누가 나를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해도 조금 기분 나빠서 씩씩대긴 하지만 결국은 ‘아이고, 이분 엄청 바쁘신가 보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요청을 드려야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할 일을 한다. 조금의 굽실거림을 얹어서.
신기한 일이다. 기꺼이 부담하려고 할 때 마음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기꺼이 한다는 마음을 먹으니 상대방도 다른 태도로 나를 대한다. 마치 죽으려고 할 때 살 수 있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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