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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Jan 24. 2023

명절 썰을 풀려다 만 이야기

생각 하나에 돌려진 마음

명절이다.


보통 명절 때는 시댁이나 친정에 가서 이틀 정도 있다가 오기 마련인데, 이번 연휴는 어머님의 큰 댁이 우리 집과 가까워서 시댁식구들이 우리 집에 들렀다가 다 함께 큰댁으로 가기로 했다. 시댁 식구들 초대가 즐겁기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모두 줄이고 기쁜 마음으로 맛있는 걸 사서 나눠 먹기로 했다. 거기까진 모두 성공했다. 돈을 적절히 쓴 덕분에 다들 기분 좋은 양질의 식사를 했고, 만족스러운 대접을 한 나도 부른 배를 통통 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음식 준비로 일찍 외가댁에 가야 한다는 어머님이 아버님과 먼저 큰댁으로 가시고, 우리는 조금 늦게 큰 댁에 도착했다. 큰 댁에 가면 참 좋다. 식구들이 모두 푸근하고, 복작복작한 게 가족이란 이런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이와 또래인 육촌 사촌이 있는 터라 아이가 정말 좋아한다. 장난감을 꼭 가지고 가서 같이 놀기도 하고, 저희끼리 이런저런 게임을 만들어서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나쁘지 않다. 부모인 우리로서는 아이를 봐주는 가장 안전한 보육장소가 바로 친척집이 되는 것이다.


그날도 나와 사촌 네가 모두 아이들을 보면서 앉아있었다. 어머님과 형제 분들은 음식 준비에 바빴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님이 내 옆으로 오시더니 나를 불러내셨다.


“며느리~ 잠깐 이리로 와봐요.”


“아~네 어머님.”


왜 부르셨나 했더니 어머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귓속말을 하셨다.


“외삼촌이 며느리들은 뭐 하는 거냐고, 왜 이 집 음식은 다 할머니(어머님과 그 자매분들)가 하는 거냐고 한마디 하시더라고. 일은 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거드는 척만 하고 있어.”


사실 별 말은 아니었다. 나를 혼내시는 말도 아니었고, 내게 뭔가를 시키시는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뭔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만 그러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않은가. 자식들도 아이들 노는 걸 보면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었던 게 다인데, 왜 꼭 며느리에게만 뭐라고 하셨어야 할까?’


식사 시간이 됐다. 20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를 감당하기엔 식탁이 너무 좁았다. 작은 방구석에 있는 교자상을 펴고 접는 게 귀찮다고 생각하신 큰 이모님이 자연스레 ‘남자들 먼저 먹고 여자들은 그다음에 먹는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먼저 먹어야 하는 남자아이’인 아들을 먹이는 임무가 나와 같은 며느리였던 사촌형님네에게 돌아갔다. 아이들을 위한 떡국과 여러 가지 반찬들이 준비되었고, 우리는 아이를 먼저 먹였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밥을 먹는 차례가 되었다. 떡국이 부족해서 가까스로 떡 몇 개가 전부인 내 떡국을 떠서 먹고 있었는데, 방에서 자고 있었던 사촌 아가씨가 나왔다.


‘떡국이 없는데… 어떡하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들끼리 서로 자신의 떡국을 양보했다. 결국 다른 며느리였던 사촌 형님이 자신의 떡국을 양보했고, 본인은 아이가 남긴 떡국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떡국을 먹고 있는데 반찬은 다 식고, 심지어 남자들이 먹었던 반찬 중 인기 많았던 반찬은 다 떨어지는 바람에 맛을 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먹을 것에 예민한 나는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밥을 얼른 해치우다시피 하고, 설거지를 하고는 거실에 앉았다. 기분이 한없이 지하로 또 암반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러다가는 세배도 못하고 집에 뛰쳐나갈 것 같던 찰나,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산책 갈래?’


남편과 함께 주섬주섬 점퍼를 입고 나와서 마음에 쌓여있던 이야기를 모두 꺼냈다. 이래서 좀 서운했고, 밥을 이렇게 먹었을 때는 서글프기까지 했다고. 사실 남편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남자들 먼저 밥을 먹으라고 엄마들이 이야기할 때 남편은 나와 함께 먹겠다고 했었다. 물론 몇 번이나 ‘이리로 와서 먹으라’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밥을 먹었지만 말이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흥분한 목소리로 내 관점에서 이야기를 펼쳤다. 남편은 ‘그래 맞지~’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시원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끝날 일이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


그랬다. 이제 남편과 내 친척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모일 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을 하면서 내쪽 친척들과의 명절 모임은 사촌 모임 외에는 나가지 않게 되었고 명절날 아빠 엄마만 만나 뵙는 게 다였다, 남편도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렇게 명절에 모일 가족이 외가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나마 남편 외할아버지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시면서 외할머니 한 분만 남게 되셨다. 이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명절에 이렇게 다 모일 일도 없게 되는 거다. 뭐가 중요할까. 밥을 먼저 먹는 일이 중요할까, 아니면 이제 만날 기회가 유한할 친척들의 안부를 묻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중요할까. 나는 내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일 때문에 정작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했다.


“응~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지.”


남편과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큰댁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집에 가기를 싫어해서 저녁까지 먹어야 할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때다 싶어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음식 하지 마세요 이모님~ 저희가 배달시킬게요.”


“그래 엄마. 뭐 할 생각 하지 말고 저기 앉아있어.”


사촌형님네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내 말을 거들면서 동시에 배달 앱을 켜셨다. 그리고 사촌형님과 남편이 저쪽 방에 박혀있던 교자상 두 개를 꺼내왔다. 우리가 배달해 온 음식으로 다 같이 한꺼번에 밥을 먹었다. 상황이 불편했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일궈낸 성과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랬다. 별거 아니라고 감정을 추스르니 ‘해결책’에 초점이 맞춰졌고,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난 우리는 사이좋게 뒷정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기분이 나쁘다고 빽 성질을 부렸으면 없었을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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