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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Feb 27. 2023

남편이 착실히 모아둔 사랑

사랑의 흔적을 발견할 때

우리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친정엄마가 전지와 크레파스에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준 후부터 아이가 몇 년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꾸준히 전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에 다니고 있는 지금은 유치원에서까지 잘 그린 몇 개의 미술 작품을 친히 가정으로 보내주다 보니 작품을 모두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민 끝에 우리 부부는 구글 드라이브에 아이의 미술작품을 촬영해 올려 두고는 촬영을 마친 그림들은 버리기로 했다.


한 두 번쯤 나도 미술작품을 촬영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 일도 버거워졌다. 아이의 그림이 하루에도 적게는 3점, 많게는 10점까지 생긴다고 생각하면 하루 촬영해야 할 그림이 꽤나 많고, 또 빛과 구도 등을 생각해서 잘 찍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움도 컸다. 더군다나 회사일을 마치고 기운을 다 뺀 상태로 아이의 저녁을 차려내고, 아이와 이런저런 놀이를 하고, 씻기는 등 일과를 하는 것도 힘에 부쳤기 때문에 어느샌가 나는 아이의 작품을 촬영하는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며칠 전 귀가가 늦었던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아이의 작품을 버렸다. 다음 날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림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이 내가 자기에게 말도 없이 그림을 보여주지도 않고 버렸다고 서운하다는 표현을 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나.’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번엔 좀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때 남편이 아직까지 아이의 그림들을 찍어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며칠 후 남편이 야근으로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평소처럼 아이와 저녁을 먹고, 같이 게임도 하는 일과를 모두 마쳤다. 아이의 가방을 정리하는데 유치원에서 아이가 그린 여러 가지 그림과, 직접 부직포로 만든 의상을 발견했다. 모처럼 늦는 남편을 대신해 오랜만에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아이의 작품을 찍었다. 오랜만에 구글 드라이브에 있는 아이 작품 폴더를 열었다. 내가 찍은 세 장의 사진을 업로드했다.


‘끝! 뭐가 있는지 한 번 봐볼까?’


난 그걸 발견했다. 바로 몇 년간 남편이 정성스레 모아 둔 아이의 수천 장에 가까운 작품 사진들이었다. 군데군데 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아기 티를 갓 벗은 아주 작은 아이 때부터 꽤나 자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편은 최선을 다해 아이의 그림을 찍어왔다. 사진을 찍은 날 날짜와 아이에게 물어본 작품 주제를 따로 메모까지 해서 말이다. 착실하게 모아 둔 사진에서 남편의 사랑을 봤다. 아이에게 품은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봤다. 이 사람이 아이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이런 사랑이 여기에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사랑은 형태가 없다곤 하지만 가끔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나를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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