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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Apr 15. 2021

아파트 동 전체에 흰 떡 돌린 날

08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


시간 순서대로 조금 편집을 했기 때문에 이 글이 이 순서에 와 있지만, 사실 이 얘기는 할머니가 두 번째 전화 인터뷰 때 했던 말이다. 그 날 할머니는 열심히 인터뷰를 준비하셨다. 나름 본인이 자랑스럽거나 기뻤던 일을 생각해서 오셨다.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언제였어요? 하고 묻기도 전에 할머니는 말을 시작하셨다.


할머니: 내가 인생에서 큰 업적이나 이런 건 없었어도 자랑할만한 거는 있다. 너희 엄마 낳아가지고 키워서 대학 보낸 게 제일 큰 자랑거리야. 그때 참 어려웠는데 삼 남매 모두 사립학교를 보내서 다들 대학을 보냈던 것이 참 잘했다 싶지.


조금 혜택을 보긴 했지. 할아버지가 당시 삼 남매가 다니던 학교 재단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수업료가 면제였거든. 그때는 중학교도 돈 내고 댕기고, 학용품이니 뭐니 다 돈을 냈다고. 그러니 사립학교에서 셋을 가르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엄마는 미술을 전공했다. 지금도 최고로 불리는 유명한 H대 미술과에 합격했다. 딸인 나도 자랑스러운 일인데 엄마인 할머니는 오죽했을까. 할머니는 꼭 그때로 돌아가서 기뻐하시는 느낌이었고, 말은 점점 빨라졌다.


할머니: 너희 엄마가 고3이었을 때야.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레슨을 어떻게 받아 받기는. 너희 엄마가 미술 공부를 주변 사람한테 물어가며 거의 혼자 하다시피 했지. 그런데 대학 시험 볼 무렵에 네 외할아버지가 미국 출장을 가시게 됐어. (정확히는 출장과 함께 돈 빌린 사람에게 빚 독촉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너희 엄마 대학 시험 볼 때 그때 무렵에 가 가지고 시험 결과가 얼마나 궁금하셨겠니. 그러니까 전화는 비싸서 못하고 엽서를 써서 보내면서 어떻게 입학시험 잘 봤느냐고 물어보고 그랬었지.


신기했다. 나한테는 참 무뚝뚝한 할아버지였는데. 엄마에게는 참 다정하셨단다. 할아버지가 멀리 미국에서 엄마의 안부가 궁금해 엽서까지 보내면서 체크를 하셨다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너희 엄마가 H대 미대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거기 넣었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느냐고 반대를 했어. 재수시킬 돈은 없었거든. 아이들이 고등학생 때 재수하는 사람은 대학 못 가는 줄 알라고 그랬더니 셋 다 열심히 공부들을 했지. 너희 엄마는 그때 M여고를 다녔는데, M여고 선생님이 그 대학교 들어갈 실력이 안 된다고 다른 여자 대학에 시험 보라고 했었어.


그때가 우리가 성수동 아파트에서 살았어. 거기서 200미터쯤 되는 거리에 교회가 있었어. 그 교회를 새벽마다 갔어. 자식들 공부시킬 라면 엄마가 기도를 얼마나 해야 하는데. 눈이 무릎 닿게 왔던 날 새벽에 교회를 갔던 것도 생각이 나.


기도를 하던 그때까지도 몰랐지. 그런데 너희 엄마가 입학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따 가지고, 등록금 4년간 면제라고 하더라고. 나는 끄트머리에라도 붙어만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말이야.


내가 얼마나 좋았겠니.


그때 엄마가 장학생 된 게 너무 기뻐서 흰떡을 해가지고 내가 아파트 동 전체에다 전부 돌렸어. 장학금 받은 게 너무 기뻐서 돌렸다고 그런 게 생각이 나. 나는 인생에 제일 기뻤던 게 그 때야.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술실기 시험을  때엔 자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입시시험을   날은 할머니 기도 덕인지 정말 좋은 자리에 가게 됐고, 그래서 점수가 좋게 나올  있었다고.


엄마는 그 덕을 할머니에게 돌렸고, 할머니는 합격한 엄마 덕분에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을 선물로 받게 됐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파트 전체에 떡을 돌리는 할머니의 신난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됐다. 왠지 그 날은 떠들썩한 성탄절 분위기가 났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떡 중에 흰 가래떡이 제일 좋더라.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1ucy/222187310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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