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의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검 Jan 31. 2021

비열한 자기 합리화

원균은 어떻게 1등 선무공신이 되었는가.

누구의 공덕인가?


정유재란 중의 일이다. 한 조선 사람이 명나라 군대 최고 지휘관 양호(楊鎬)에게 말한다.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입니다.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이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에 대해 양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패배'는 이순신이 백의종군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어설프게 부산을 공격하려 하다가 일본 수군에게 야밤 기습 공격을 받아 전 함대가 전멸하게 되는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일본의 공격이 시작되자 경상 우수사인 배설이 전선을 무단으로 이탈하여 12척의 판옥선만이 보존되었을 뿐이다.  


'공'은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말한다. 배설의 12척에 김억추의 1척을 더해 13척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 133척을 대파한 해전이다.


명나라 지휘관은 이순신을 이리 높이 평가하는데 도리어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는 말을 하는 이 조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순신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며, 명나라 지휘관에게 절을 하겠다는 이 사람은 바로 조선의 왕 선조이다. 



명량대첩


명량해전은 영웅담이 아니다.


물길이 좁고 물살이 센 울돌목에서 이순신의 판옥선은 처음 몇 시간 동안 홀로 적군을 맞이했다. 이순신을 사즉생을 외쳤지만 장수와 병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순신만이 죽음을 불사하고 홀로 솔선수범을 보여 앞장섰을 뿐이다. 대장이 그대로 죽는 꼴을 볼 수 없어 안위, 김응함의 두 척의 판옥선이 뒤늦게 합류했다. 선체가 높고, 포격이 강한 판옥선이 쉽게 깨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야 나머지 판옥선들이 참전한다. 그 시점에 물길이 바뀌어 조선 수군은 순류를 타고 영화 명량처럼 회오리 속이 갇힌 구루지마의 일본 선봉 수군을 대파한다. 포격에 사망하여 바다에 떠나니던 구루지마의 시체를 항왜 전사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그 시체를 건져 올려 참수하여 돛대에 건다. 일본군은 전투 의지를 잃고 퇴각한다.


일부 일본인들은 이순신이 단지 수송선을 공격에 승리했을 뿐이라고 하며 이를 깎아내리려고 한다. 앞의 전투한 133척은 전투선, 뒤의 200여 척이 수송선인지 아니면 전체 333척이 모두 수송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투선, 수송선을 그렇게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군 전문가인 구루지마를 선봉에 내세우고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와키자카가 2선에 있었던 것을 보면 구루지마의 선봉 부대를 전투 부대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실 수송선이 333척이었든, 200 척이었든 수송선이 많았다는 것은 명량대첩 승리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정유재란 왜군은 직산에서 육군이 명나라 군을 만나 북상이 저지되고, 서해안을 돌아오려던 수군 보급선이 막히게 되자  이상 한양으로 진격을 포기하게 된다. 선조는 이순신을 버렸지만, 이순신은 선조를 살렸.  

 

명량대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군이 합심하여 왜적을 무찌른 영웅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두려움에 빠진 장수들과 병졸들을 뒤로한 이순신만의 고독하고 외로운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도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 못했는지 후에 이 승첩을 '천행'이라 표현했다.


  

비열한 선조의 자기 합리화


그럼 도대체 선조는 왜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명나라군의 공만 높다고 말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순신을 파직시켰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한 것은 자신이고, 이순신을 파직시킨 것도 자신이다. 명나라군의 공적이 크고, 이순신의 공이 작아야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참으로 비열한 자기 합리화이다.


왜란이 끝난 후 원균이 이순신과 나란히 선무공신 1등 자리에 놓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1만여 명이 넘는 조선 수군을 무참히 남해 바다에 수장시킨 원균이 1등 선무공신에 들어갔다. 신하들도 반대했지만 선조는 막무가내였다. 선조는 원균의 이름을 3등, 2등 다시 조정하여 1등 공신에 넣도록 명한다. 원균이 훌륭한 장수로 기억되어야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기 합리화


자기 합리화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다. 사실과 현실을 부정하며 거짓을 말하는 비열한 행위이다. 개인적인 화풀이로 학생을 때리고는 "사랑의 매다" 말하는 선생님,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하는 부장님 말씀도 모두 자기 합리화이다.


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는 자기 합리화는 더 많다.


"이 정도면 난 충분히 했어"

"하고 싶어도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나는 인맥이 없고 백도 없어서 안돼"

"나는 충분히 열심히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못 알아볼 뿐이야"

"내 주위에는 멍청이들이 많아서 되던 일도 안돼”

"이건 원래부터 안 되는 거였어 "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이나모리 가즈오가 말한다. 지금 그 일을 사랑하라. 다른 방법은 없다.




참조 링크

 : 황현필의 명량해전(유튜브)

        

매거진의 이전글 사실과 본질 추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