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버티던 시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덥다, 덥다 하면서 반팔을 입고 다녔던 거 같은데 갑자기 춥다, 춥다 하면서 경량 패딩을 챙겨 입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기온이 낮아지면 따뜻한 국물이 더더욱 간절해지는 건 나뿐일까? 여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차가운 디저트류 생각도 나지 않고, 따뜻한 걸 먹지 않으면 왠지 온종일 속이 허전하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꼭 남매 국밥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경리단길에 살기 시작한 건 2019년 여름부터다. 그때도 이미 많은 상가가 ‘임대’ 현수막을 건 채로 비어 있었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곳이 바로 경리단길이었으니,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난 세입자들로 인해 이곳은 죽은 상권이 되었다. 게다가 2020년부터 코로나가 휘몰아치며 더더욱 우리 동네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조용한 밤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으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점과 카페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다.
나는 아직도 ‘문오리’에서 자개소반에 둘러앉아 먹던 진한 오리 전골이 그립고, 루프탑에 놓인 고속버스 의자에 앉아 장바구니에 담긴 스콘을 먹으며 남산타워를 볼 수 있던 ‘말카’가 그립고,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같던 ‘엘리1930’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바라보던 이태원초등학교 운동장 풍경이 그립다. 난리 통에도 ‘엉터리 통닭’은 건재하다는 점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경리단길의 이름을 딴 망리단길, 송리단길, 공리단길 등등 수많은 리단길들이 새롭게 부흥하고 있을 때, 경리단길에는 ‘경리단길을 살려 주세요.’라는 포스터가 빈 거리에 쓸쓸히 나돌고 있었다.
순전히 식당 이름 때문에 한두 번 돈가스를 먹으러 갔던 적 있던 ‘라라 식당’이 문을 닫은 자리에 새로 공사가 시작됐던 건 작년 10월쯤이었다. 가게 내부가 말끔히 치워지고 뚝딱뚝딱 인테리어가 되어 가는 걸 보면서 뭐가 들어올까 궁금하던 차에, ‘남매 국밥’이라는 간판이 달렸다. 어떠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간판과 정직한 글씨체만 봐도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갔다. 경리단길 초입에 국밥집이 생긴다니!
작년 초겨울에 처음 남매 국밥을 먹으러 갔다. 오픈 주방에 다찌 테이블이 둘러진 내부는 국밥 식당이라기보다는 오마카세 식당 같았다. 주방 안에는 정말로 남매 사장님이 계셨다. 지금은 메뉴판이 바뀐 거 같지만, 당시 메뉴는 단출했다. 기본 남매 국밥. 얼큰 국밥. 정식. 그리고 소나무 틀에 나오는 수육. 기본에 충실한 맛도 궁금했지만 원래 얼큰한 걸 좋아하는 나는 얼큰 국밥과 수육을 주문했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남매 국밥도 맛보시라고 커다란 대접에 국물을 아낌없이 그득하게 떠 주셨다. 한 숟갈 먹자마자 우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국물은 아주 진하고 고소했다. 잘 삶아진 채소에 싸 먹은 두껍고 쫄깃한 수육도, 많이 맵지 않고 산뜻하게 얼큰했던 빨간 국물도, 윤기가 흐르던 밥과 아삭한 부추무침까지!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곳에서 ‘사람 냄새’가 났다는 거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식당인데도 벌써 남매 사장님과 안면을 튼 단골분들이 오갔다. 추운 겨울 저녁, 모두가 둘러앉아서 따뜻한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는 장면은 참 따뜻했다. 가게의 훈기로 유리창엔 뽀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남매 사장님은 손님들과 도란도란 한두 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뭔가를 만들고, 끓이고, 씻어내고, 분주하지만 느긋한 흐름으로 가게를 돌보고 계셨다. 남매 국밥 앞을 오갈 때마다 그때의 아늑함이 문득 생각나곤 했다.
남매 국밥이 생겼을 즈음을 기점으로 경리단길엔 조금씩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왔다. 거리 두기가 해제되며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다시금 경리단길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제 주말이면 어떤 카페들은 자리가 없어서 앉을 수 없을 정도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버티던 시기가 이제는 지나간 거 같다.
밥심이라는 말이 있다. 무릇 우리의 몸은 바깥 시련이 있을수록 잘 먹어 줘야 체온도 유지하고 스트레스도 낮추며 심신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 곧 추운 겨울이 온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하던데, 모두들 국밥 한 그릇처럼 따뜻하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으며 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