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사랑B Oct 03. 2021

작지만 확실한 위로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아주 특별한 백화점이 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범고래가 되는 꿈, 난임부부의 세 쌍둥이 태몽, 부모님으로 일주일간 살아보는 꿈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꿈을 판매하는 백화점이다. 잠들어야만 입장 가능한 곳이므로 고객은 모두 잠든 사람들. 따라서 그들은 외출복이 아닌 잠옷과 슬리퍼를 신고 찾아와 꾸고 싶은 꿈을 고르고, 꿈을 꾸고 난 뒤 느낀 감정의 절반을 값으로 지불한다. 이 감정들은 마을 은행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백화점 입장에서는 감정이 풍부한 손님에게 맞춤형 꿈을 많이 팔수록 좋기 때문에 단골손님을 관리하는 체계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고객들은 잠에서 깨면 이 백화점에서 꿈을 샀다는 사실을 잊는다. 단지 현실처럼 생생한 내용과 잔상으로 남은 감정만 기억할 뿐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잠, 그리고 꿈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직선 같은 삶에, 신께서 공들여 그려 넣은 쉼표인 것 같아요!"



 꿈에 관한 일반적인 학설을 요약하자면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다. 깨어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하거나 억누르고 있던 정서들이, 잠들어서 무의식이 활약하기 시작하면 꿈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이 무의식의 반영을 고객이 자기 상황이나 감정에 걸맞은 내용의 꿈을 고르는 것으로 묘사했다. 직원들이 고객에게 이런저런 상품을 권하기도 하지만, 백화점 주인 달러구트의 철학은 '손님에게 맞는 꿈을 판매하는 것'이 기본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꿈 제작자들에게는 고객의 꿈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꿈을 만들어 파는 마을 나름의 상도덕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고민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손님들에게 예약을 받아 꿈을 맞춤 제작해주기도 한다. 단, 조건은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 위에 인용한 주인공 페니의 말대로 잠과 꿈은 최고의 휴식이자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을 줄여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성과를 내는 것이 노력의 척도인 현대사회에서 꿈은 별로 의미 없는 신체 현상 또는 개꿈(!)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나만 해도 꿈을 꾸지도 않지만 어쩌다 꿈을 꿔도 깨고 나면 까맣게 잊기 일쑤여서 '아, 개꿈이구나.' 버린다. 달러구트 백화점 입장에서는 장사에 전혀 움이 되는 고객이다. 꿈을 꾸고 나서 느낀 감정으로 값을 치르는데 꿈이 무슨 내용인지 기억 못 하면 상품을 공짜로 준 셈이 되니까.

 

 그래도 소설을 읽는 며칠간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만일 오늘 밤에 꿈을 꾼다면, 그 꿈은 달러구트 백화점 몇 층에서 누구에게 산 것일까? 하고 상상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기 때문이다. 30년 경력의 프런트 직원 웨더? 추억에 관한 꿈을 파는 2층의 비고 마이어스? 스펙터클한 꿈을 취급하3층 매니저 모그베리의 추천으로 샀을까? 4층은 아기와 동물들에게 꿈을 파는 곳이므로 어른 사람인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팔리지 않은 꿈을 할인 판매하는 5층에서 모태일의 화려한 말발에 넘어가 구입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페니가 친절하게 추천해준 꿈을 샀는데 기억력이 나빠 잊어버린 거라면 미안해서 어쩌지? 어흑.



<달러구트 꿈 백화점> 1권 전자책. 표지가 예뻐서 종이책도 소장하고 싶다.



 소설 한 권 읽고 웬 주책이냐, 감정이입이 과하다, 할 수도 있지만 이게 바로 소설의 본질 아닐까?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에 푹 빠져드는 것. 그 세계가 현실에 없는 판타지 세계라면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등장하는 고객은 대부분 독자가 자신을 대입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시험의 압박에 시달리는 학생, 앞날이 막막한 취준생, 번뜩이는 영감을 찾아 헤매는 가지망생, 짝사랑에 빠진 청춘남녀 등. 이 소설이 10대와 20대에게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오직 앞만 보고 달릴 것을 강요받는 청년들에게 좀 쉬엄쉬엄 해도 좋다는,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다는 위로를 건네때문이다.



"여러분을 가둬두는 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저와 같은 신체적 결함이든... 부디 그것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다만 사는 동안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기분이 드는 날도 있을 겁니다. 올해의 제가 바로 그랬죠. 저는 이번 꿈을 완성하기 위해 천 번, 만 번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보지 않고, 절벽을 딛고 날아오르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독수리가 되어 훨훨 날아오르는 꿈을 완성할 수 있었죠.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만든 꿈이, 그런 여러분에게 영감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연말 행사인 '올해의 꿈' 시상식에서 '절벽 위에서 독수리가 되어 날아가는 꿈'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꿈 제작자 킥 슬럼버의 수상소감이다. 그는 한쪽 무릎 아래가 없는 채로 태어난 장애인이지만 그 덕분에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찾는 법을 깨달은 인물이다. 누구에게나 자유는 제한되어 있고 삶의 질곡은 다양하다.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길은 사람 수만큼 많은데, 한국 기성세대 중에는 청년세대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는 이가 별로 없다. 말로는 청년들을 걱정하면서 정작 그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지에는 무관심하니까. 숨 가쁜 경쟁에 지쳐 헐떡이는 젊은이를 나약하다고 나무라기만 하지 물 한 잔 건네면서 쉬었다 가라고 말해주지는 않으니까. 그 결과 우리는 10대와 2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시대를 살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대로 "자기 자신과의 경쟁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잡으려는 무모한 시도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청년들에게만 그럴까? 꽤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유치하고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봤는데, 설정이나 대사는 좀 유치한지 몰라도 이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는 오랜 세월 세계적인 명사들이 반복해서 말해온 삶의 본질에 관한 고찰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행복하게 살고 있나? 매일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라고 하루를 소홀히 다루면서 사는 의미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아닌가? 이젠 그만 떨쳐도 좋을 과거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거나, 미래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다소 초라했던 과거를 멸시하며 자기 자신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의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서 행복을 바랄 수 있을까?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소설 읽기에서 꼭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지 않아도, 세상의 조리를 날카롭게 풍자하지 않아도 좋은 소설일 수 있다. 판타지는 가상 세계지만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 경험적 세계를 골조로 삼아 이루어진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속 꿈을 파는 마을과 그곳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쩌면 눈에 빤히 보이는 해답을, 너무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엉뚱한 방향을 보면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오늘 밤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푹 자보자. 그러면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유능한 직원들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을 알려주는 꿈을 추천해줄지도 모른다.

이전 03화 디지털 중독에서 벗어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