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정신과 이야기 3
다음 날 아침 아린 심장을 아리지 않은 척 붙들고 아이에게 물어봤다.
“머릿속에 글자가 막 떠다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아. 요즘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게 있었어?“
“잘 모르겠어, 엄마.”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아도, ‘내가 왜 이런 게 떠오르고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 천천히 생각하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한 번 생각해 볼래?”
“알았어. 해볼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랫동안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미술치료도 공부한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은 열리지 않고 눈이 열렸다.
열린 눈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서럽게 떨어졌다.
진정한 뒤 상황을 말하자 언니는 “지금이라도 아이가 엄마에게 도움을 청해줘서 다행”이라며, 문제를 알게 된 것만으로 이미 해결의 길 위에 있다고 다독여줬다.
이럴 때 고민 없이 턱 하고 전화를 걸어 말하기 어려운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이를 키우면서 수없이 느끼고 또 생각한다.
언니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 며칠을 혼자 끌었을 것이다.
정신과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고, 그것도 ‘내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건 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정말 가야 하나? 이게 맞는 걸까?’ 이런 생각을 끝없이 돌렸을 것이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사리분별과 합리적인 판단 안에서 잘 살아왔다.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겁나는 일이 아니고 설레는 일로 여기며 살았다.
(비록 마무리는 자주 흐지부지되지만!)
그런데 육아라는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이성은 출산할 때 병원에 놓고 온 듯하다. 조그만 일에도 '헉'하는 반응이 허다하고 언제부터 이렇게 큰 불안이 내 안에 숨어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육아 세계 입성 전의 불안은 표면에 올라와도 통제가 가능했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불안은 다르다. 그때 생기는 불안은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나 불안해. 불안하다고.' 소리치는 난리통이 된다. 그런 요란한 불안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엄마도 자라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엄마 자신에 대한 탐구와 단단한 자존감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슬픔과 불안을 나누고 위로를 주는 존재도 필요하다.
그저 '아이를 키운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조건 없이 마음을 들어주고 위로까지 선물해 주는 사람들.
그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싶다.
천사들에게 사랑을 보낸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조력자가 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비슷한 마음의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 학교를 다녀온 지효는 본인의 증상이 왜 나타났는지 이유를 이야기해 줬어요.
아이의 기질마다 다르겠지만,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봐주시거나 비슷한 상황이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다음 회에 이야기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