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 Sep 05. 2024

<오전 9시>

전력질주는 아닐지라도



오전 9시는 시작의 시간이다.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해도 출발선 앞에서 몸을 푸는 달리기 선수처럼 나는 오전 9시가 가까워 오는 동안 슬슬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예를 들면 책상에 공간을 마련하고, To-do list를 펼쳐놓고,  해야 할 일들과 관련한 아이템을 세팅해 놓는다. 그림을 그려야 할 때면, 이젤을 펼치고 스케치북의 빈 페이지를 올려놓고, 연필과 붓, 채색물감, 그리고 물통에 깨끗한 물을 담아 놓는다.

  

시곗바늘이 오전 9시를 가리키면, 펼쳐놓은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왜 굳이 "9시"이어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일종의 내 강박인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주부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 하루 중 이 시간, 오전 9시였다.      

오전 8시 30분 탕비실은 묘한 설렘이 있다. 일찍 출근한 동료들과 모닝커피를 하며 근황토크나 협업 중인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10분 남짓한 시간.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담백함과 넘치지 않게 적절한 감정선이 있다.      

출근 전 모닝커피는 하루 한 알 비타민같이 내 세포들을 깨우듯 흡수된다.      

9시가 가까워 오면 자연스럽게 각자 자신의 일자리로 찾아간다. 나의 일 자리.    

 



그러나 주부의 삶에서는 오전 9시에도 찾아갈 내 일 ‘자리’는 딱히 없었다. 

텅 빈 탕비실에 홀로 있는 기분이었다.      


회사 다니는 내내 꿈꾸었던 프리랜서 같은 삶, 내가 좋아하는 일이 주인공이 된 스케줄이란!


하지만 막상 그런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집구석 어딘가 내 "자리"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 뿌듯한 '개인중심적인' 스케줄이 있었지만,  집 안 일이라는 것은 회사일과는 달리 당최 예측할 수 없이 그 스케줄을 방해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9시 전까지 환기와 청소를 끝낸 후에 9시부터 거실 책상에 앉아 온라인 강의를 듣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청소기를 다 돌렸다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청소기 먼지통을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지통 비우기는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먼지통이 말썽이다. 뭐가 문제지? 10분이 지났지만 해결을 못했다. AS 접수를 해야 한다. AS센터의 전화연결은 정말 어렵다. 나는 직원과 직접 통화를 원했다.  건너고 건너서 한 참만에 겨우 직원과 연결되어 방문수리를 접수했다.


이제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작동시켜 두었던 세탁기에서 빨랫감이 완성되었다는 음악소리 들린다. 책상으로 향하던 몸을 다시 돌려 세탁실로 가 빨래들을 건조기에 넣는다.      

그냥 넣으면 구김이 심해진다는 걸 지난번에 알았다. 나는 빨래 하나하나를 꺼내 탈탈 털어 최대한 편 후 건조기에 넣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바쁘다.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건조기에 빨랫감을 넣는 일은 시간이 꽤 걸렸다.     


내 자리로 돌아온 시간은 9시 40분. 그런데 강의를 듣고 있자니 재미가 없다. 주위에 함께 듣는 동료도 없고 나를 찾는 전화벨도 없고, 내 이름을 불러대는 부서장도 없는 현실을 새삼 둘러본다.  


오전 내내 쉬지 않고 움직였건만, ‘내 일’을 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강의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고개를 드는 의구심. '이걸 열심히 들어서 뭐 하지? 심지어 ‘재미’마저 없는 것을...'  

머릿속에선 나도 모르게 왜 이 온라인 강의가 재미없는지 분석하고 개선점에 관한 기획(안) 목차가 마구 그려진다.  습관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자동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오전 9시는 우울함과 자괴감, 자기부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간으로 변했다.     

결승선을 위해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가던, 우승을 예감하고 서 있던 오전 9시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오전 9시를 극복하는 방법은 ‘나 다움’을 찾는 과정에 있었다.      

‘오전 9시에 남들과 똑같이 달려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모든 꽃이 봄에만 피지 않듯이 똑같이 출발하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내가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필요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나를 평가해 줄 사람, 내가 평가받을 대상이 부재한 이 현실에서 내 존재의 의의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나는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는데 그 인정은 다른 사람이 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오전 9시의 강박은 이런 타인의 평가에 나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기도 했다. 

9시면 남들은 본격적인 달리기를 시작하는 시간인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니?라는 말로 나를 꾸짖던 책망의 소리를 내려놓았다. 타인의 시선과 속도에 비추어 경쟁하는 내가 아니라,  타인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를 스스로 입증하려는 시간을 살고자 노력했다. 


아직도 시곗바늘이 오전 9시에 가까워져 오면 나는 긴장한다.

슬슬 준비운동도 한다.  

마음 한편에선 땅! 하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도 여전히 들린다. 

하지만 그 순간 옆도, 뒤도 보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 나가진 않는다.  

나 다움을 향한 일들을 내 속도대로 시작한다. 

오전 9시는 그렇게 '나'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 믿음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 오전 9시를 살아가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당신의 시간 스펙트럼 속에서도 <오전 9시>가 빛나기를 바랍니다. 


(오전 9시가 반드시 오전 9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찾아가는 그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이전 02화 <새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