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리워서...
민둥산은 참 특이했다.
보통 산은 정상을 '오른다' 할 때에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정상까지 올라간다.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로 줄곧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랐다 내렸다를 하다보면 산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둥산을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오르기만 하고, 내려올 때에도 그저 내려만 온다.
'오히려 쉽겠는데?' 라는 생각은 참 단순했다.
좀처럼 오르고 내리는 변화없이 오르기만 하면 되는 길은 몹시도 단조로왔고 이내 심심해졌다.
길이 좁아서 일까? 산을 오르는 사람들조차 발견하기 어려웠다.
주차장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옆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같은 모양새의 나무들.
어느정도 올랐다 싶어 다시 봐도 아까 보았던 나무들과 다를 바 없다.
오르고 올라도 같은 풍경의 연속일 뿐.
아, 억새 풀밭은 언제나 나타날까? 정상은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청명한 가을날의 산행을 한껏 기대할 수 있는 날이건만, 왜 이렇게 심심한 것인지...
나는 정녕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없나보다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글쓰기 멤버님들 중에 정말 기가 막히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꿰뚫은 글벗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라면 이런 곳에서도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셨겠지...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정석진 작가님의 브런치).
엇? 중간정도 올라왔나 싶은 곳에 기대치도 않던 휴식장소가 있었다.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어디있다 나타났는지 신기했다. 벤치에 앉은 노부부,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눈에 띄인다. 김밥을 나눠먹는 부부,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갑자기 풀리면서 즐거워진다.
얼마간 휴식을 취한 사람들과 우리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앞서거나 뒷서거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올라온 길과 다르지 않는 풍경이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이상하게 지루하지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 서로 대화하며 걷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저 함께 걷는 사람들이 가까이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마음이 한결 가볍고 즐거워졌다.
산행의 중반을 넘어가며 정상이 가까와오자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주변은 두런 두런 대화하는 소리, 웃음 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 소리가 함께 하는 오르막 길은 전혀 지루하지도, 심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진심 '가을 산행'이 그리웠고 기다렸지만, 산행 자체가 기쁨을 오롯히 주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고 경이로와도 함께 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대하고 바랬던 장소에 있었지만, 막상 사람들이 없는 적막함을 느끼니 그런 바램은 빛을 잃었다...
정상에 오르자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정상에 펼쳐진 멋진 억새풀밭을 함께 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건강하고 멋진 모습에 덕담을 건네며...
내려오는 길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화이팅 하세요~" 큰 소리로 인사하며 지나는 고등학생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물어보는 아주머님께도 친절하게 남은 길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너는 몇 살이니?"
"9살이요"
"그런데 혼자 가?"
"저 아래 부모님이 올라오고 계세요, 저는 하나도 안 힘들어서 뛰어 올라왔어요"
야무지게 대답하는 9살, 남의 집 아들을 우리 부부는 기특하게 바라 보았다.
아, 사람들이 함께 가는 길이라야 행복한 길이구나.
어짜피 각자의 길을 걷지만, 스쳐만 지나는 사람들이라도 있어준 덕에 내 인생이 지루하지 않는 것이었구나. 잠시라도 인사를 나누고, 힘든 구간에서는 화이팅을 외쳐주고, 남은 시간을 묻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위로와 용기를 건네면서... 그렇게 우리 인생은 사람들과 함께 가야 행복한 것이구나...
나는 민둥산을 올랐을 뿐인데, 작은 인생길을 체험하고 내려온 듯한 충만한 마음이었다.
나와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내 인생 주변에 그저 엑스트라처럼 왔다 갔다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약속시간보다 할머니는 공원에 한 시간이나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나 또한 서둘러 오려고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먼저 와 계신 할머니를 보자마자 놀라 물었다.
"할머니, 왜 이렇게 빨리 나와계세요? 날씨도 쌀쌀해 졌는데..."
"사람이 그리워서... 일찍 나와봤다."
30대의 나는 그 말이 가슴에 남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조금은 할머니의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산행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낯설고 상관없는 사람들, 그저 스쳐지가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이 있어 내 인생길도 외롭지 않은 것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