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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운운하는 사람의 말은 걸러 들으세요

#2 플라톤이 남긴 최고로 어처구니없는 착각


여러분은 혹시 '본질'이라는 단어를 종종 쓰시나요?


인생의 본질, 사업의 본질, 인간관계의 본질,


이런 식으로요.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멋들어지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뭔가 특별한 걸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말하는 본질을 이해하면 마치 대단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기죠.


하지만 본질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의 말은 걸러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본질을 자주 운운한다면,


그건 그가 제대로 모른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죠.




본질을 운운하는 사람의 말을

걸러들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적인 성질을 의미하는 본질,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말을 왜 걸러 들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본질이라는 단어가 잘 모르면서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예를 먼저 살펴보고 그 안에 숨겨진 철학적 맥락을 춰 보겠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사업의 본질은 고객만족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볼게요.


짧지만 꽤나 매력적인 말이죠?


사업의 본질이 고객만족이란 말을 들으면 그가 마치 사업에 통달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사업의 본질이 고객만족일까요?


고객을 만족시키는 기업은 승승장구할까요?


아쉽게도 현실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고객만족에 초점을 맞춰서 사업을 운영하다가 수익구조가 뒤틀려 위기에 처하는 기업들많죠.


대표적으 당근마켓을 들 수 있는데요.


당근마켓의 누적 가입자는 3,200만 명이고, 한 달에 1,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접속합니다.


한국마케팅협회와 소비자평가에서 공동 주관하는 브랜드고객만족도 조사에서도 2020년부터 3년 간 중고거래 부문 1위를 차지할 만큼 이용자 만족도도 높.


하지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당근마켓은 2015년부터 8년 연속 적자이고, 2022년엔 무려 565억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출처 : THEPR <’당근’이 ’마켓’을 뗀 이유는? “다양한 실험중”>



혼자 치킨을 5천 원에 팔아서 장사가 잘 되는 게 능사가 아닌 것처럼,


고객들만 만족시킨다고 해서 사업이 잘 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론할 수 있어요.




"아니 사업의 본질이 고객만족이라는 말은,
그냥 고객만족이 중요한 요소라는 뜻 아닙니까?"





물론 그런 뜻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만약 그렇다면 굳이 '본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요?


고객만족은 그저 사업 여러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요.


사업을 예로 들었지만, 어떤 분야든 그 분야에 대해서 잘 알면 알수록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직접 부딪쳐 볼수록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걸 알게 되고,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아직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깨기 때문죠.


오히려 충분한 경험이 없어 어떤 변수가 있지 모를 때,


아는 것이 적어 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를 때,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논의의 마침표를 함부로 찍어댈 수 있습니다.


본질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는 건 곧 그 사람이 단순하게 사고한다는 증거인 거죠.




인문학을 공부할 때 특히

본질이란 단어를 쓰면 안 되는 이유




그나마 이 단어를 사업, 마케팅, 운동 같이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에서 쓰는 건 괜찮습니다.


적어도 여러 증거들을 통해 무엇이 '그나마' 본질에 가까운지 시시비비를 가려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문학이나 철학 같이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분야에서 본질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인문학자들과 '교육에서 평등의 윤리'라는 주제로 토론하다가 고초를 겪습니다.


리처드 파인만(영어: Richard Phillips Feynman 1918년 5월 11일 - 1988년 2월 15일) 양자 전기역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토론을 듣고 있던 파인만은 '평등의 윤리'라는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서 토론자들이 아무 말을 막 해도 주제와 무관하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주제를 명확하게 정의하자고 제안하죠.


하지만 철저히 무시당하고 맙니다.


마음이 상한 파인만은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다"



라고 말하면서 다시는 토론회에 가지 않겠다고 고합니다.


인문학과 철학에서 다루는 개념은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울 때가 분명 있습니다.


과학에서처럼 한 사람의 의견이 옳은지 그른지 실험이나 계산으로 판단할 수도 없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말을 떠들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이전 철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하든,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예시를 들든,


어떻게든 자신의 말 뜻을 명확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질을 자주 운운하게 되는 인문학을 공부할 때야 말로 본질 같은 단어를 더 주의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걸 본질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 시작하면 같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죠.


여담이지만 저는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논의를 건너뛰는 사람과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어차피 말하는 그도, 듣고 있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반복될 거니까요.


바로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과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주제가 등장하는데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본질이라는 단어에 꽂히는 걸까요?


본질을 아는 것이 곧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거란 그 '본질의 로맨틱'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난 걸까요?




플라톤이 남긴

최고로 어처구니없는 착각




본질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의 사고 습관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플라톤(영어: Plato 기원전 428년~347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어려운 말 빼고 플라톤의 생각을 정리해 볼게요.


플라톤에 의하면 하늘나라에는 '이데아'라는 진짜 세계가 있어요.


이곳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죠.


반면에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그 이데아라는 세계를 본 따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현실 세계는 이데아 세계와 달리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계속 변하고 사라지.

 

플라톤은 참된 지식을 얻어 세계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현실에서 눈을 돌려 이데아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어요.


바로 이런 플라톤의 생각이 용어만 바뀌어서 현대까지 이어져오면서 본질을 찾아 헤매는 기나 긴 인류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고대 철학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신의 세계로,


현실 세계 신이 만든 인간 세계로 용어만 바뀝니다.


참된 세계인 이데아와 그 세를 본떠 만든 현실 사이의 구도 그대로 유지되죠.


중세 교회에서 말하는 전능한 창조주와 그를 모방해 만든 인간의 구도,


불변하는 영혼썩어서 사라지는 육체의 구도도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론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근대도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만들어놓은 이데아와 현실의 구도는 그대로 유지돼요.


대신 근대에서는 신의 자리를 이성이 대체하죠.


신을 탐구하며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 했던 중세 사람들과 달리,


근대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이성을 통해 세계의 궁극적인 질서를 파악자 해요.


이 흐름의 시작이 르네상스고, 절정이 과학혁명입니다.


16세기부터 코페르니쿠스 -  갈릴레이 - 케플러 - 뉴튼으로 이어지는 천문학의 발전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 아니며, 인간은 무한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걸 밝혀냈어요.


신이 인간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학적 세계관을 뒤집은 거죠.


또 생물학에서의 다원의 진화론은 인간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게 아니라,


자연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의 번영을 통해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학적 세계관에 큰 타격을 주었죠.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과학혁명은 인간은 신의 도움 없이도 세계의 작동 원리와 인류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해요.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이성을 통해 세계의 궁극적인 질서를 밝혀내겠다는 근대의 프로젝트 역시 플라톤이 세상을 바라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데아라는 본질을 설정해서 세상의 참된 모습을 알고자 했던 플라톤의 문제의식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넘어서 후대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 거죠.


이런 이유로 현대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근본을 이루는 본질이 있고,


그 본질에 닿을 수 있다면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인류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 현대철학자들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온 그 사고방식의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현대 철학자들은

왜 플라톤과 작별했을까?




여러분이 전통 철학자처럼 생각하는지, 현대 철학자처럼 생각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당신을 알고 싶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실 건가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 무엇인지 고민해 답해줄 건가요?


아니면 내가 가족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직장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연인에게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 다양한 해줄 건가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신 분은 고대, 중세, 근대의 전통 철학차처럼 생각하는 분입니다.


다양한 관계 안에서 변화무쌍한 나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신 분은 현대 철학자처럼 생각하는 분이고요.


전통 철학자들은 모든 개체에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전제하고, 각각 개체들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밝혀내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았습니다.


반면 현대 철학자들은 하나의 개체에는 정해진 본질이 없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그 속성이 만들어진다고 봤어요.


예를 들어 의자는 원래부터 의자라는 본질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사물이든 인간이 앉는 순간부터 의자라는 속성을 갖게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현대 철학자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까요?


그 이유는 본질을 중심에 두고 시작하는 사고의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었어요.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을 '이성을 가진 동물'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 탐구는 이성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로 집중됩니다.


정에서 인간이 가진 무의식, 감정, 신체 등과 같은 요소는 모두 탐구 주제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이성적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장애물 정도로 치부되고 말아요.


무의식, 감정, 신체와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는 데 더 핵심적인 부분일 수도 있는데도요.


이런 문제의식에서 현대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만든 구도 아래서 이성을 통해 진리 탐구에만 힘쓰던 근대까지의 철학에서 벗어나서 색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해요.


들뢰즈는 불변하는 보편적 진리의 정반대 편에 서서 변화와 차이에 집중해서 세상을 설명하고자 했고,


프로이트는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하는 받는다며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탐구했죠.


또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나를 중심으로 한 윤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나보다 타인을 더 귀하게 여기는 타자의 윤리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어요.


토마스 쿤은 인간은 기존에 갖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100% 객관적일 수는 없다는 점,


지배적인 과학 이론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정치에서와 비슷하게 과학계에서도 혁명이 일어난다는 점을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과학에서만큼은 객관적인 인간이 불변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최후의 보루도 토마스 쿤에 의해 논쟁거리가 됐.


이처럼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각자 독창적인 방식으로, 다방면에서 탐구를 이어가면서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본질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생각하기




본질을 찾아 헤매는 사고방식의 문제는 "그 본질을 정말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 때문이 아니에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본질이란 걸 걸 찾아 헤매다가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다른 것들을 놓치기 제이죠.


여기까지 읽고 어떤 분들은



본질이란 단어 가지고 참 심각하게도 말하네!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본질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생기는 문제를 말하기 위해 2,000년 넘는 서양 철학 역사를 지나왔으니까 그럴 만도 하죠.


맞습니다.


대부분의 단어는 깊은 고민을 하면서까지 쓸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어떤 단어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저는 본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단어라고 생각해요.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복잡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본질을 찾아 그걸로 세상을 간편하게 해석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본질이란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 복잡한 이 세상에 발맞춰가며 부지런히 생각하며 사는 겁니다.


저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보이게 조작해서 지적 허영심을 안겨주는 본질이란 단어를 버리고,


복잡한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게 인생을 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이란 단어로 포장해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이해시킬 수 있을 때야말로 제대로 된 앎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이제는 플라톤과 플라톤이 남긴 지적 탐구의 역사와 작별할 때입니다.


만약 누군가 본질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면 의심해 보세요.


그는 핵심을 꿰뚫고 있어서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핵심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서 본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현실주의자를 위한 철학> 두 번째 에피소드 플라톤 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항연], 플라톤, 왕학수 역, 동서문화사, 2019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리터드 로티, 김동식, 이유선 역, 사월의 책, 2020

[전통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무엇이 변화했나?], 김종욱, 인문학브런치, 2023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3], 움베르토 에코, 리카르도 페드리가, 윤병언 역, 아르테, 2021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철학아카데미, 도서출판 동녘, 2018

[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 철학아카데미, 도서출판 동녘, 2019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 외 1명, 이광래 역, 열린책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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