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삶이 느려진 뒤에 남는 질문

삶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이들에게

by 서수정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는 걸음이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하루는 이렇게 끝나곤 했다.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늦어도 괜찮은 시간으로.

요즘 사람들은 즐거운 이야기를 자주 했다.
파크골프 이야기,
새로 시작한 취미,
다음 주에 있을 모임.
그는 그 이야기들을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에서 밀려나 있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섞여 있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에도 삶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그는 그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루를 정리하며 ‘살아 있음’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을 이어가는 일보다
삶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더 어려운 질문이 되어버렸다.
그는 루미의 의자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의자는 그를 부르지 않았고, 그 역시 무언가에 이끌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오래 서 있다 보니 앉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의자에 앉자 몸보다 먼저 마음이 반응했다.
단단히 붙잡고 있던 생각들이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도, 지금 당장 정리해야 할 마음도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에서 웃음소리가 스쳤다.
누군가의 하루가 아직 활발하다는 신호처럼
밝고 빠른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나도 뭘 좀 해야 하나.’

그 생각은 스쳤지만 마음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역할을 살아낸 기분이 들었다.
그는 평생을 책임 속에서 살아왔다.
가족의 중심이 되는 법,
버팀목이 되는 법,
묻지 않아도 감당해야 했던 몫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왔고,
그 믿음은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느슨해진 자리에는
새로운 방향 대신 조용한 공백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곁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조용히 펼쳤다.
무엇을 찾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글자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책을 읽는 그를 보며 루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이 시간을 채우려 하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미는 조명 가까운 자리에서 날개를 접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건네지 않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사람이 이제 막 자신에게 도착했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즐거운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마음에 머물렀다.
무엇을 채우지 않아도, 삶이 당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이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루미는 그가 다시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알아차렸다.

"삶이 느려진 뒤에야 질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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