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래치는 멋진 별무리를 그렸다.
밑바탕에 아무것도 없던 도화지에 점이 생겼다.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의 배는 한번 더 불러 동생을 낳았다. 점들이 모여 연결고리가 생겼고, 갖가지 모양의 선이 그려졌다. 항상 내 편인 사람들, 가족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함께 성장하고 자라나며 직선이었던 선은 여러 가지로 뻗거나 완만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네모의 꿈을 꾸고, 세모의 우정을 알게 되었고, 동그라미로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지우고 그리다를 반복하며 밑그림 같았던 크로키는 소묘에 가까워졌다. 빠르게 형태를 잡아나가는가 하면 한 모양일 이루기까지 오래 걸리는 부분도 생겨났다. 도화지 여백이 점점 채워져 갈 때쯤, 색이 짙어지다 옅어지다를 반복하며 감정 기복에 따른 물감들이 칠해졌다.
기분이 좋을 땐 밝을 빛을 띄고, 우울하거나 절망에 빠질 때는 어두운 색을 띄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여러 색깔들이 내 인생을 어여쁘게 칠해주었다.
어느 날,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게 되고, 그것이 사랑으로 변하자, 한 번도 보지 못한 색들이 마음에 흘러 들어왔다. 내 도화지는 원래 흰색이 아니었던 것처럼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자부했다.
사랑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도화지가 머금을 수 있는 농도보다 색이 짙어지자 종이는 울퉁불퉁 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감정보다 내 감정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핑크빛에서 붉은색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감정 기복은 심해졌고 선들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마음은 파업을 요구했고, 눈물도 마를 날이 없었다. 도화지는 과한 붓질로 조금씩 찢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높은 채도를 유지하기 힘든 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선과 색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내 마음에 하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렸다.
누군가의 술 한잔이 검은 도화지에 선을 그려 주었다. 누군가의 전화 한 통이 또 선을 그려 넣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툭 하고 검은 어둠을 번지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작은 불꽃놀이처럼 밝혔다 어둡게를 반복했다.
다시는 밝아질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검은 도화지에 그려 넣은 선 틈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색깔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형 안에 그려진 하나의 색이 아닌, 선 하나하나가 이제 상처가 아닌 밤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져 별무리를 이루었다.
그저 민무늬였던 도화지는 어느새 광활하고 넓은 우주를 닮아가기 시작했고, 한 두개 선을 시작으로 작은 별자리를 만들었다. 점, 선, 면 그리고 온갖 색이 모여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